"젊어서는 맨날 이 남자가 어디가서 이렇게 늦게 들어오나했는데, 아, 글쎄, 요런 재미가 있었지 뭐야. 요 공이 주머니(구멍)에 쏙 들어가는 걸 보면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어."초파일이자 어버이날인 8일 오전 서울 서초동 한국당구아카데미에서 만난 권중희(72·서울 송파구 삼전동) 할머니. 공휴일이지만 서예가인 남편 조형원(76) 할아버지와의 당구데이트를 거를 수는 없었다. 부부가 함께 당구 삼매경에 빠진 것이 벌써 6년째. 심각한 위궤양 증세로 수년에 걸친 병원생활을 했던 조형원 할아버지는 당구를 치면서 건강을 되찾았고, 시동생 셋에 시부모, 슬하에 6남매까지 거두느라 취미생활은커녕 허리 펼 시간조차 없던 권 할머니도 당구를 접하면서 비로소 노년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부부가 당구를 접한 것은 6년전 송파구 삼전동 노인대학에 함께 다닐 때 였다. 조 할아버지는 젊어서 한때 누구나 그랫듯 담배 연기 뿌연 당구장에서 누군가 시켜놓은 자장면 냄새를 맡아가며 공을 치기도 했지만 썩 즐긴 편은 아니었다.
당구의 참 맛을 알게된 것은 거의 50년만에 대를 다시 잡으면서. 당시 노인대학에 무료 강습을 나왔던 한국당구아카데미 송형복 원장의 도움으로 할머니와 함께 포켓볼을 새로 배운 것이 계기였다.
"배우고 보니 노년 건강엔 당구가 최고인 것 같아. 남들은 당구대 주변을 뱅뱅 도는 게 뭐가 좋냐지만 이게 운동효과가 상당해. 1시간 치면 걷기 운동 두시간은 한 것 같은 효과가 나거든. 거기다 어떻게 하면 이 공을 저기 있는 구멍에 쏙 넣을까 각도 계산하고 대 놀리는 방법 계산하고 두뇌운동에도 그만이지,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니까 허리에도 좋지. 당구치면서는 어디가도 제 나이로 안 봐, 60대로 안다니까."
부부가 함께 배우고 나니 늘 맞수가 되어줄 상대가 있는 것도 재미를 더한다. 두 사람은 일주일이면 꼭 삼일을 하루 서너시간씩 포켓볼에 몰입한다. 체력이 부칠 법도 하지만 할머니는 "어쩌다가 당구를 거르면 어깨가 결리고 팔이 무거워진다"며 오히려 당구 건강론을 펼친다.
할머니의 당구실력이 아무래도 처지다 보니 할아버지는 게임을 하면서 교사 역할도 한다. 할머니가 그 나이 또래들 중에는 운동감각도 있고 잘 치지만 살짝 치고 빠져야 할 때 세게 밀어내는 등 힘 조절이 잘 안되는 것이 흠이라고 말한다. 그럼 할머니에겐 선생님에 대한 불만이 없을까? "왜, 남편이 자상해서 다른 여자들도 많이 가르쳐주는데 그게 이상하게 질투가 나더라고. 그래서 내가 '자기 여자나 잘 가르치지, 왜 남의 여자까지 가르치느라 난리냐'고 뭐라고 했지. 질투심은 노인네나 젊은이나 마찬가지인가봐."
두 사람의 포켓볼 게임 전적은 여태까지 할아버지의 백전백승. 부부간에 너무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법 한데 할아버지의 주장은 당당하다. 부부간에도 승부는 냉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보고 인정없다고 하지만, 몰라서 하는 소리야. 게임인데 승부가 흐지부지되면 재미가 없잖아."
당구를 통해 건강과 노년의 즐거움을 새롭게 되찾은 두 사람은 요즘 주변 친구들에게 취미활동으로 당구를 적극 권장하는 등 당구 전도사로서도 한 몫을 톡톡히 해낸다.
"동네 노인정 가보면 건물만 덜렁 있고 아무 놀잇감이 없어. 그나마 우리는 둘이 같이 늙어가니까 서로 부추겨가며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려고 하지만 혼자 있는 노인네들은 그저 잡담이나 나누지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를 보내니 얼마나 딱해. 늙을수록 몸을 많이 움직여야 건강에도 좋은데. 정부가 이런 노인들을 생각해서 다양한 레저활동에 참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줬으면 하는 게 바람이야. 노인복지관 등을 통해 당구동호회를 조직하는 것이면 금상첨화겠지…."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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