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는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해 한반도의 농경법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고구려 지역 언어가 옮겨간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됐다. 또 세계 주요 언어의 확산은 이 같은 농사 기술 전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일본어의 뿌리가 고대 한국어라는 가설은 '일본어의 기원'을 쓴 로이 애드루 밀러 등 언어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제기돼 왔고 국내와 일본 학계에도 비슷한 견해는 많았지만 이처럼 시기까지 거론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 UCLA 자리드 다이아몬드 박사와 호주 국립대 피터 벨우드 박사는 지난달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일본어는 기원전 400년께 한반도에서 일본 남부 규슈(九州)로 건너와 쌀농사를 짓고 이 농경법을 일본 북부로 확산시킨 농경민 언어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3, 5, 7 등의 숫자를 표기하는 고구려어가 각각 '密' '于次' '難隱'으로 중세 이후 한국어와 완전히 다른 반면 '미(mi)' '이쓰(itu)' '나나(nana)'로 발음되는 일본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밀접한 관련이 거론돼 왔다. 다이아몬드 박사 등은 고대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독자적 언어를 갖고 있었으며 현재의 한국어는 신라어에서, 일본어는 고구려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고구려어가 일본어의 기원이라는 이들의 주장은 농업의 발달과 전파가 언어 확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할 동안 부양 능력이 크지 못해 인구가 적었다. 하지만 농사법이 생겨난 뒤 인구가 팽창했으며, 급격히 불어난 농경민들이 차츰 수렵채집민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농경민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주변 인류의 언어를 대체하게 된다. 언어 전파는 인종이나 민족 확산 방식과는 달리 충돌할 경우 혼합되기보다 우세한 한 가지만 채택되는 형식이 될 수밖에 없어 확실한 인구학의 지표라고 이들은 지적했다.
학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하위 언어(1,436개)를 가진 니제르―콩고어족(반투어족)을 들었다. 서아프리카에서 얌(열대아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마과의 덩굴 식물)을 재배하며 반투어를 사용한 농경민들은 지금부터 5,000년 전 남부와 동부로 퍼져나가기 시작해 아프리카 대륙의 3분의 1에 이르는 지역으로 확산됐다. 그 결과 수렵채집민들의 언어였던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의 코이산(Khoisan)어는 대부분 반투어로 대체됐다.
비옥한 농경지대를 가진 중국 역시 오스트로아시아어(중국 남부, 인도, 말레이시아, 태국, 캄보디아에서 사용)와 타이어(태국 북부와 라오스에서 사용) 및 한장(漢藏)어(현재 중국어와 티베트, 미얀마 등에서 사용하는 티베트 미얀마 어군으로 구성) 등 3개 주요 어족의 발생지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1,236개의 하위 언어를 거느린 오스트로네시아어를 처음 만들어 쓴 것 또한 중국 남부의 농경민이다. 이들은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대만을 정복했으며 이곳을 창구로 폴리네시아 도서로 언어를 전파했다. 기원후 1200년에는 뉴질랜드까지 이 언어의 영향이 미쳤다.
동쪽에서 중국의 비옥한 농경지대가 언어의 발전소 역할을 했다면 서쪽에서 이런 역할을 감당한 곳은 레바논에서 이라크에 걸친 비옥한 초승달 지대이다. 여기서 서구의 3대 주요 언어가 만들어졌다. 그 중 하나가 현재 인도 남부에서 쓰는 드라비다어이고, 또 하나는 인도유럽어이다. 인도유럽어는 계통이 갈라져 서구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중동에서는 이란어 힌두어로 발전했다. 세 번째는 아프로아시아(Afroasiatic) 언어로 고대 이집트어와 아랍어 히브리어를 포함한 셈어족이 이에 해당한다. 멕시코에서 옥수수와 콩을 재배하던 농경민이 북쪽으로 옮겨가 현재 미국 남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자신들이 사용하던 우토아즈텍어를 전파한 것도 비슷한 경우이다.
다이아몬드 박사는 극지의 이누이트족처럼 농업만이 언어 확산의 요인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주요 어족을 넓은 지역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한 것은 농업이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농업 전파는 같은 위도 상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언어의 전파도 남북보다는 동서축으로 훨씬 더 쉽게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인류의 기원 등 고생물학이 전공인 다이아몬드 박사와 동남아시아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벨우드 박사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언어학자도 적지 않다. 농업문화 확산이 언어 전파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인정해도 인도유럽어족은 농경술 전파 훨씬 이전인 기원전 4500년께 이미 수레와 말 등 농경 권력의 기초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이들은 지적했다. 또 셈어족은 5,000년 전에 서남아시아로 퍼졌지만 아프로아시아어족은 1만3,000년 전에 생겨났다는 점을 들어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농경민이 이들 언어를 각 지역으로 전파했다는 가설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도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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