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반 '니부가리'(빡빡머리)로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라면 뭉뚱그려서 '만화 마니아'로 불러도 됨직하다. 어린이날은 있었지만 어린이를 위한 사회적 환경이나 시설이 전무했던 시절, 만화방은 마른 버짐 핀 더께머리 소년들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었기 때문이다.박기정(朴基禎·69)선생은 65년 한 소년 권투선수의 분투기를 담은 만화 '도전자'를 내놓았다. 가난한 집안의 소년이 생계와 학업을 위해 프로권투 무대에 뛰어든다는 이야기였다. 모두 45권의 단행본으로 발행된 이 만화는 실질적으로 한국 스포츠만화의 효시로 꼽힌다. 재일동포 소년 주인공 백훈이 일본 여성 하루코의 헌신적 뒷바라지와 착한 소녀 친구 미미의 격려로 일본의 기라성 같은 권투 선수를 차례대로 누르고 챔피언에 오른다는 가슴 찡한 내용. 여기에 깨소금 같이 등장하는 수경이, 오동추, 구홍이, 고구마 등 조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가 곁들여진다.
'도전자'는 "기상천외하고 웃겨야 한다"는 만화에 대한 선입견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한 소년 권투선수의 처절한 삶이란 소재 설정에서 느낄 수 있듯 '도전자'는 결코 명랑만화가 아니었다. 내용 전편에는 민족적 비애가 무겁게 깔렸고, 그 반발 작용인 항일(抗日)과 극일(克日)의 정서가 그림 칸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이런 극적(劇的) 배경은 작가의 뛰어난 붓 그림, 펜 터치로 더욱 리얼하게 묘사됐다. 마치 암울과 페이소스에 절은 딥 퍼플(Deep Purple)의 팝송 '용병'(Soldier of Fortune)의 멜로디를 연상케 했다. 때문에 이 만화는 당시 청소년들을 즐겁게 해주었다기보다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해야 정확할 듯싶다.
박기정 선생은 '도전자'의 창작 배경에 대해 "우리의 청소년에게 강인한 의지를 심어주는, 혼이 담긴 작품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선생의 이런 의도는 야구만화 '황금의 팔'을 비롯해 '폭탄아' '비전자' '레슬러' 등 스포츠 소재 만화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더욱 뚜렷해 졌다. 스포츠를 통한 정정당당하고 투지 있는 청소년 상의 제시. 그것이 그의 '만화창작관'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만주 용정(龍井)에서 태어났다. 46년 월남해 경복 중고와 경희대 국문학과를 다녔다. 56년 4월 중앙일보(현재의 중앙일보가 아님)에 4칸 만화 '공수재'를 연재하면서 만화가로 데뷔했다. 60년에는 '흰구름 검은구름'을 발표하며 '훈이'와 '미미'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선생의 만화를 통한 '청소년 사랑'은 78년 중앙일보의 시사만화를 맡으면서 일단 막을 내렸다. 99년 3월까지 이 신문에서 1칸짜리 만평 창작을 비롯, 캐리커처 작가로 활약했다.
지난해 12월 경기 이천의 청강문화산업대학이 만화박물관의 개관기념 기획전시회로 '박기정―시대의 호흡과 시선'전을 가졌다. 선생은 현재 미국 메이저리그의 주전으로 우뚝 선 한 야구선수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를 그리고 있다.
/손상익·한국만화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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