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주(47) 성주인터내셔널 대표는 국내 보다는 해외에서 더 주목 받는 여성 최고경영자(CEO)이자 월드 오피니언 리더다. 다보스포럼이 선정한 차세대 지도자 100인(1997년), 아시아위크 선정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2001년), CNN 선정 '새 천년 리더'(2003년) 등 김 사장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예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그러나 샌드위치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인터뷰를 시작하는 모습에서 재벌 2세의 특권의식이나 성공한 사람 특유의 오만함은 찾아 보기 어려웠다. 김 사장은 할 말이 무척 많은 듯 했다. 그는 현재의 국내외 정세를 '예측 불허의 상황'이라고 규정하고 "글로벌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이라는 울트라 슈퍼 파워가 이라크를 순식간에 괴멸 시킨 것에서 보듯 세계 질서는 새롭게 재편되고 있습니다. 정보기술(IT)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21세기는 인터넷 혁명과 글로벌 시대가 될 것입니다. 기존의 세계화가 주권 국가 중심의 선별적 개방이라면 글로벌화는 인터넷 연계를 통해 돈, 정보, 재화가 분·초 단위로 국경을 넘나드는 한 차원 높은 단계의 세계화를 뜻합니다. 이제 국가의 개념이 변하고 있습니다."
김 사장은 글로벌 시대에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핵심 역량은 '소프트 파워'를 키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뢰 확보를 통한 국가 브랜드 제고, 기업 투명성 확보 등과 같은 무형 자산에 대한 투자와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투명성 결여가 상류사회의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됐다고 꼬집었다. 외환위기도 한국에 대한 신뢰성 결여 때문에 발생했다는 진단이다.
"외국에서는 우리를 '부패 공화국'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위기가 오자 일시에 자금을 빼내간 것입니다. 소위 가진 자들이 최소한의 책임만 다 했어도 그처럼 경제가 일시에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괿sse Oblige·가진자의 의무)가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대성산업 창업자인 고 김수근 전 회장의 7남매 중 막내 딸인 김 사장은 어릴 때만 해도 대표적인 '노블레스'의 한 사람 이었다. 그가 가진 자들의 무책임을 비난하고, 그들의 의무를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스스로가 '공주'의 삶을 거부하고 혼자 일어섰기 때문이다.
김 사장의 인생이 극적인 반전을 맞게 된 것은 이화여고 2학년 때 맞은 넷째 오빠의 죽음이었다. 가장 의지했던 오빠가 대학 진학에 실패한 후 세상을 버린 충격으로 김 사장은 한 때 대학 진학도 포기할 만큼 심각한 비관에 빠졌다. 김 사장이 마음을 추스르면서 결심한 것은 '안락함이 보장된 피동적인 삶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치열한 삶을 이뤄보겠다'는 것이었다. 연세대 신학대에 들어가 부친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 유학을 떠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 사이가 벌어져 생활비도 끊겼다.
"오빠의 죽음을 보면서 '오빠의 삶까지 살아 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화려한 파티, 호화판 생활, 정략적 결혼 등 보호막 속에서 살아야 하는 전형적인 삶에 회의가 일었습니다. 집안이 반대하는 결혼도 했습니다. '안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탈출을 시도한거죠."
김 사장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의 고생도 겪었다고 털어 놓았다. "집안의 지원이 끊기면서 먹고 살기 위해 직장을 잡았습니다. 운 좋게 시작한 사업이 궤도에 올라 어느 정도 성공도 맛보았지만 보이지 않는 어려움은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김 사장의 손은 재벌집 딸의 섬섬옥수와는 거리가 멀다. 상처까지 있는 두꺼운 손마디에는 고생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땅의 재벌들은 국민의 땀과 정부의 특혜 지원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탈세와 변칙 상속에 여념이 없습니다. 정직해야 할 지식인들도 권력과 돈에 아부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특권 집단처럼 행동하고 있죠.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국가 브랜드를 높이려면 가진 자들이 변해야 합니다."
김 사장은 명품의 식민지가 된 국내 패션 시장에 글로벌 명품 브랜드를 만드는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를 위해 올해 안에 런던에 디자인 회사를 설립하고 자체 인터넷 쇼핑몰도 구축할 계획이다. "21세기는 여성이 경제 주체가 될 것입니다. 이제 '여성 이병철회장'이 나와야 합니다." 세계에 도전장을 던진 여성CEO의 당찬 각오다.
/송영웅기자 herosong@hk.co.kr
■ 김성주대표 누구
-1956년 경북 대구 출생
-이화여고·연세대 신학과 졸업, 런던정경대학원 수료(국제정치학), 하버드대 대학원 수료(기독교윤리/경제학), 앰허스트 칼리지 명예박사(인문학)
-1985년 미국 블루밍데일스사 회장 직속 기획팀 근무
-1986년 코리아 비즈니스월드지 미국 지사장
-1991년 성주 인터내셔널 설립
-2000년 (주)아이윌비그룹 설립 및 사장 취임
-가족관계: 딸 지혜(14)
■ 성주인터내셔널은
성주 인터내셔널은 1991년 김성주 사장이 독일의 MCM 핸드백 수입 판매를 시작하면서 설립한 토털 패션 유통회사. 96년부터 영국의 종합 유통회사인 막스&스펜서의 국내 판권도 들여와 수입, 판매하고 있다. 환란 직전까지 구치, 이브생로랑 브랜드를 직수입 판매하다가 본사로 되팔기도 했다. 2002년 70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했으며 올해 매출액은 900억원이 목표다.
■나의 여가
주말이면 사랑하는 열 네 살 된 딸 지혜와 경복궁 근처의 갤러리를 찾는다. 지혜는 장래에 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한국인의 정신을 느끼며 예술적인 감각을 키우는 것 또한 변호사가 되기 위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약간은 성숙한(?) 학생이다.
갤러리를 찾는 시간은 바쁜 생활 속에서 잠시 잊혀졌던 자신을 되돌아 보며 사업 아이디어를 구상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행복한 시간이다. 특히 딸과의 스킨십은 물론, 일주일간 나누지 못했던 모녀간의 이야기를 주고 받는 소중한 시간이다. 얼마 전 내가 CNN이 선정한 'Best of Asia'의 8인 리더 중 1명으로 뽑혀 CNN 인터뷰를 할 때도 소격동 선재 미술관내의 고풍스런 한옥에서 딸 지혜와 함께 촬영을 했다. 서양인들은 다른 문화를 흡수하여 자기들만의 것으로 재창조해 내는 탁월함이 있는데 비해, 우리는 우리 것을 너무 홀대하며 귀하게 여기지 않는 편이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우리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외국 친구들이나 비즈니스 파트너가 오면 일부러 인사동 등을 방문한다. 우리 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고, 그 문화의 우수성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내 딸과의 주말 시간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가장 행복한 추억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내가 본 김성주 대표
외환위기가 왔을 때 작은 중소기업의 대표인 김성주 사장은 외국계 브랜드 하나를 팔아 수 천만불의 외화를 국내로 들여오는 매각 협상을 성공시켰다. 김 사장이 협상 과정에서 발휘했던 창의적이고 융통성 있는 협상력은 내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는 여성의 잠재력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놀라운 사건이었다.
김 사장은 사업가이면서도 가슴이 넓다. 직원들의 자녀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협력업체 사장들을 방문, 팔을 걷어 붙이고 공생의 길을 찾는다. 김 사장은 비전을 갖고 있다. 돈 버는 사업가이지만 돈을 위해 돈을 버는 재물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궁극적 목표는 개인과 사업체를 묶어 한국, 나아가 인류에 봉사하는 것이다. 2001년에 출간된 그녀의 자서전 '나는 아름다운 왕따이고 싶다'의 인지 수입 전액도 북한 결핵환자와 어린이들을 돕는데 썼다.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CNN 등 세계적 오피니언 리더 그룹이 그녀를 차세대 리더로 인정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유연한 사고를 겸비한 김사장이 외국과의 공적, 사적 미팅 시마다 한국을 대변하고 유창한 영어와 높은 식견으로 좌중을 압도, 민간 외교관으로서 국익을 대변한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김사장은 세계를 읽는 눈을 가지고 국가의 장래를 항상 염려한다. 또 '가진 자의 의무'를 실천하면서 야무진 사업가의 길을 걷는다. 종교적 믿음에 기초한 김 사장의 담백하고 깨끗한 사생활은 끊임없는 상상력과 풍부한 창의성을 주는 원천이다.
김 사장이 갖고 있는 창의성과 비전을 현실과 조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후원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는 한국 여성을 일깨우고 21세기 여성의 경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업 이윤의 일부를 여성에게 환원하고 있다. 김 사장이 우리나라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미래 지도자 중의 한 명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송문호 안진회계법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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