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뜻을 알아라인간사에 대한 동서양의 전통적 시각은 상당히 다르다. 이 때문에 사회 생활에서 운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생각도 차이가 있다. 운에 대한 동양의 전통적 인식은 대체로 운에 순응하는 경향이 강하다. 음양오행 사상에 입각해 조화와 순환을 강조하는 동양 고유의 세계관 때문이다. 음과 양은 서로 대립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오묘한 조화를 통해 만물을 생성하고 변화시킨다. 개인의 생명과 길흉화복은 물론 국가의 흥망성쇠 역시 음양오행이 서로 기운을 북돋우거나 사그러지게 하는 상생상극의 원리에 좌우된다고 본다.
음양오행에 따른 개인의 운명이 전적으로 초월적 힘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다는 뜻은 아니다. 단순히 음양오행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서양의 '물리결정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지, 즉 개인의 선택과 주관적 행위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되고 만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유명한 역술가들은 개인의 운세를 사주(四柱), 즉 생년월일시의 간지(干支)를 중심으로 보거나 성명(姓名·이름자), 수상(手相·손금), 관상(觀相) 등을 보고 운세를 봐 주면서 무엇보다 심상(心相·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이들이 운세를 본다는 것은 음양오행에 따른 거대한 자연적 변화와 개인 운명의 우주적 암호인 사주(四柱) 등을 함께 고려해서 특정 시점의 개인 혹은 집단이 어떤 처지나 환경에 놓이는지를 살핀다는 뜻일 뿐이다. 따라서 개인이나 국가는 거대한 우주적 섭리를 근본부터 거스를 수는 없어도 다가올 상황에 미리 대비함으로써 어느 정도 운명의 지배를 누그러뜨릴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적 변수에도 불구하고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음양오행 원리에 따라 진행되는 우주적 변화 과정의 일부로 이해하면서 그런 하늘의 뜻, 즉 천명(天命)을 알고 그에 따르는 순명(順命)을 개인은 물론 국가 최고 지도자의 미덕으로 간주해 왔다. 다산 정약용은 '인정승천'(人定勝天), 즉 사람이 마음을 정하면 하늘의 뜻을 이긴다고 했지만 이는 전통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의 기운이 싹트던 때에나 가능한 생각이었다.
이런 이유로 음양오행 사상의 영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운이 작용한 결과를 두고 부당하다거나 공정하지 못하다고 따지는 경향이 그리 강하지 않다. 그저 하늘의 뜻을 야속해하며 체념하는 것이 주된 대응 방식이다. 운명이 하늘의 뜻이라면 개인이 그 부당성을 지나치게 따지는 것 자체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부덕한 행위일 수도 있다.
이런 사회도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다. 순명을 미덕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기존의 사회질서를 인위적으로 위협하는 행위나 사고는 금지되며,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풍토 때문에 변화와 발전에 대한 욕구가 미약해 활력이 떨어지고 정체하기 쉽다. 반면 인간의 삶을 포함한 자연을 조화와 공존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사회구성원들이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마음가짐을 갖기 쉬워 사회적 갈등과 긴장을 완화하고 개인의 삶도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
또 하나의 결정론
근대 서양의 세계관과 사회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데카르트와 뉴튼의 영향으로 형성된 기계론적 세계관은 세계를 일종의 기계로 본다. 우주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 작용―반작용하는 물질의 상호작용 체계이다. 개개의 물질 사이에는 동양적 세계관에서 흔히 보는 조화를 향한 자연스러운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물질은 각각 고립된 원자로 존재하고 작용―반작용 법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운동할 뿐이다.
이런 생각을 그대로 밀고 가면 인간의 몸과 마음까지도 모두 물질계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자연의 물질은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인간의 생리·심리 작용을 일으키며, 최종적으로는 정신 현상까지도 만들어 낸다. 그에 따라 인간의 모든 사고와 판단, 그리고 행위 역시 궁극적으로는 물질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런 입장을 흔히 물리주의(physicalism)라고 부르는데 이를 기계적으로 견지하면 자유와 도덕적 존엄성 같은 인간의 이상은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유 의지의 산물로 생각한 모든 행위가 실제로는 물질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 미리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뉴튼적 세계관의 진실성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의 삶 역시 우주가 시작한 순간에 이미 '결정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개인의 운도 동양보다 더욱 숙명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운은 결국 물질 법칙에 의해 미리 결정된 미래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
이런 세계관의 강력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근대 서양의 가치관은 물질과 인간의 정신(혹은 의지)을 구분하는 또 다른 사조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사고 경향은 신의 예정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기독교의 한 분파와, 물질과 정신을 구분된 실체로 보려는 데카르트 이후의 특정 철학 사조에서 비롯했다. 이런 사조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의 섭리와 달리, 때로는 그에 거스르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이 자유의지를 통해 자유롭게 사고하고 판단하며, 행위하는 도덕적 주체로 살 수 있으며 그것이 인간 존엄성의 바탕이 된다는 생각이다.
근대 서양의 역사를 보면 결정론보다는 자유의지론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사회계약설이다. 이에 따르면 사회란 자연상태의 불안과 혼란을 피해 개개인이 자유의지로써 약속을 통해 이루었다. 따라서 개인은 자신과 공동체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정치·사회적 주체가 된다.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관점에서는 인간사에 대한 운의 영향은 큰 딜레마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 스스로의 선택과 행위를 통해 개척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인간사에 대한 운의 개입과 작용은 이와 같은 상황을 위협한다. 운은 인간의 의도와 행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 의도한 바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에 대한 전적으로 개인에게 물을 수 있을까?
어떤 농부가 정성껏 농사를 지었지만 태풍과 홍수 때문에 흉작이 됐다면 그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 정당한가?
이처럼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책임을 강조하는 문화에서는 운은 판단하기 곤란한 철학적 문제를 야기한다. 운의 영향은 어떤 결과에 대한 개인의 공과(功過)를 모호하게 만들어 공정한 보상과 처벌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는 공과와 보상이 일치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저주와도 같다.
자율과 자조를 넘어서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순전히 운에 의해 결정된 상황이나 처지에 대해서는 부당성이나 공정성을 따질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의도적 행위자가 없다면 상황이 부당하다고 하기 어렵고, 따라서 책임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빗속을 걸어가던 사람이 벼락을 맞아 죽었거나 크게 다쳤다면 애석한 일이긴 하지만 결코 부당한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시장경제 체제에서 어떤 사업가가 부도가 나서 망하게 됐다면 그 또한 안 됐지만 시장의 자유로운 교환관계가 유독 그만을 의도적으로 차별한 것이 아니므로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본다.
이런 주장대로 인간이 의도적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면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어린 아이를 본 모든 사람들이 "아이를 우물에 빠트린 것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구할 책임이 없다"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그런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인간미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회이자, 결코 누구도 살고 싶어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실제로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경우에도 타인의 불행에 연민을 느끼고, 심지어 분노하기까지 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이 어쩔 수 없는 불운 탓이었다고 해도 사회가 그 불행을 완화해 주어야 할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인간 사회에는 자유나 자조의 원리 못지 않게 소중한 또 다른 이상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김 비 환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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