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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57) 블루스, 그 끝없는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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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57) 블루스, 그 끝없는 매력

입력
2003.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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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은 시종일관 한국적 록이다. 재즈도, 국악도, 모두 거기에 다다르기 위한 길이었다. 그 여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블루스다. 내가 블루스를 했다면 놀랄 사람이 한둘 아닐 것이다. 그렇다. 알려진 나의 음악에는 블루스도, 블루스적 요소도 없다. 그러나 미군 무대 연주 시절, 블루스는 필수였다.한국에 들어 온 서양의 대중 음악 가운데 이것만큼 잘못 이해 된 것도 없으리라. 이번 기회에 블루스와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에 얽힌 저간의 오해도 바로 잡고자 한다.

미군 부대에 들어가 보니 분명 록도 재즈도 아닌데 어딜 가도 들려 오는 음악이 있었다. 단순한 음들을 반복해 가면서, 울부짖듯 또는 신음하듯 묘하게 마음을 끌던 그 정체 모를 음악은 우리의 타령과 흡사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이상하게 끌려 나 역시 뜻도 모른 채 그냥 따라 했다.

블루스는 무엇이든 열 두 소절이 기본이다. 가장 단순한 음악 양식인 것이다. 그러나 화성(코드)이 아닌 가락(mode)의 노래였다는 점은 그때 껏 내가 생각해 온 모든 음악적 상식을 뒤집었다. 그 이상한 음률의 비밀을 캐 들어가던 나는 그것이 미국에 팔려 간 아프리카 흑인들의 울부짖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차츰 알 수 있었다. 백인들의 로큰롤에 동조할 수 없다는 흑인의 자존심도 그 이유였다. 조상들이 겪었던 일들을 그들은 고유의 어법으로 재창조해 냈는데 그게 블루스란 음악 양식이다. 문제는 서구의 전통적 음 체계에서 볼 때 좀 엉터리였던 그 음악에 서구인들이 주목하고 감동했다는 데 있다.

아무 것도 모르던 내가 따라 하게 된 음악, 블루스는 백인 클럽에 가면 관심은커녕 아예 할 수도 없는 음악 장르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 블루스의 정체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알게 된 블루스는 빌 헤일리의 백인 블루스였다. 나는 웬지 주술적인 분위기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에 취해 자꾸만 연주했다. 그것은 감상자 보다는 연주자를 위한 음악이었다. 자기의 연주 기량을 밑바닥까지 파올려야 하는, 일종의 '진실 게임'이었다.

연주자를 위한 음악, 블루스가 한국에서는 은밀한 사교 댄스의 상징으로 쓰이기 일쑤다. 어찌해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게 된 걸까. 출발점부터 잘 못 됐다.

한국에서 블루스란 말이 유입된 것은 일제 하에서 상류층의 사교 문화로 존재하던 이른바 '땐스홀' 때문이다. 그렇게 유입된 블루스 역시 슬프고 느린 정서의 음악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슬프고 느리게 나가는 음악은 무조건 블루스라고 오해한 탓이 가장 크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성인 남녀의 사교 댄스 음악은 무조건 블루스라고 통칭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잘못된 일본을 뒤따라 블루스를 리듬의 개념으로 보게 된 데서 오해가 싹튼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해 두는데, 블루스란 광범위하게 흑인 특유의 가락, 즉 우울한 음률을 가리킨다. 나는 미군 무대에 있을 때 블루스를 즐겨 연주했으나, 이후에 한 나의 음악에는 블루스란 없다. 모두 한국적 록이기 때문이다.

블루스는 음악인들끼리 통하는 암호였다. 미국인들, 특히 흑인들에게 블루스란 고향의 소리였다. 그러나 동양으로 건너 와 사교 댄스 음악으로 잘못 자리를 잡은 블루스가 제 대접을 받는 경우도 있으니, 영업이 끝난 뒤 뮤지션들끼리 모여 뒷풀이 할 때다. 술 파티는 저리가라 할 만큼의, 진짜 음악적 열정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요샌 가끔씩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내 생일 같은 날이나, 동료의 잔치 같이 기분 좋은 날이면 독특한 뒷풀이를 한다. 그 요체가 바로 블루스다.

우드스탁에서 난 아들들에게 호기롭게 말한다. "야, 하자!" 그리고는 이내 블루스적 음률로 한 소절 짧게 연주한다. 그 이후는 말이 필요 없다. 내가 블루스 형식에 맞게 1∼2분 가량의 간단한 주제를 제시하면 바로 그 뒤로 한명씩 돌아가며 모두 합쳐 20∼30분씩 변주가 이어지는 것이다. 정말 거기에는 단 한 마디의 말도 필요 없다. 평소 갈고 닦는대로, 머리로 생각할 틈도 없는, '음악적 진실 게임'이 펼쳐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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