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한계상황에 처했을 때 상상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기적 같은 성공을 일구어낸 일화와 사례들은 의지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가르쳐 준다. 그 가운데 사마천(司馬遷)이 궁형(宮刑)의 고통을 이기고 <사기> (史記)를 써낸 이야기는 너무 감동적이다. 궁형이란 남성의 성기능을 제거하는 형벌로서,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으로 인간을 파멸시키는 혹형이다. 자존심을 먹고사는 선비에게는 사형보다 잔혹한 형벌이 아닐 수 없으리라.■ 한 무제의 사관이었던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것은 옳은 말을 서슴지 않는 선비정신 때문이었다. 흉노를 토벌하러 간 이릉(李陵)장군이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투항한 일을 간신들이 헐뜯자, 그가 충직한 인물임을 대변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궁형을 당하고 옥에 갇힌 사마천은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죽음의 유혹에 시달려야 했다. 선비는 죽일 수는 있지만 욕보일 수는 없다 하지 않았는가. 삶과 의로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는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한다 하지 않던가. 사기>
■ 그러나 사마천은 죽지 않았다. 책 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을 필생의 업으로 여기기도 했지만, 선친의 유언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역시 사관이었던 그의 아버지(司馬談)는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아들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젊어서부터 역사를 읽고 듣고 기록해 두었던 내용을 130권의 책으로 써냈다. 상고시대 황제(黃帝)로부터 전한(前漢)까지 2,600년의 통사인 본기(本紀)가 12권, 문화사인 서(書)가 8권, 열국사인 세가(世家)가 30권, 개인전기인 열전(列傳)이 70권, 연표가 10권이다.
■ 육체적인 고통을 이기면서 책을 쓰는 동안 그를 괴롭힌 것은 왜 하늘이 의로운 사람을 돌보지 않느냐는 의문이었다. 아첨과 시기, 거짓말과 음모를 일 삼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부조리를 개탄하면서, 그는 사실에 충실한 글을 쓰기에 심혈을 쏟았다. 그가 역사의 혼(史魂)이라 불리게 된 것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준엄한 역사의식 때문이었다. 사초(史草)가 될 수 있는 글 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천퉁성(陳桐生)의 <사혼 사마천전> 번역 판을 읽는 기쁨은 개방중국 가까이 살며 누리는 몇 안되는 행운의 하나다. 사혼>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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