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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민족 과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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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민족 과잉증"

입력
2003.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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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서울의 한 신문사 편집국기자1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8,000여대의 폐연료봉에 대한 재처리 작업까지 마지막 단계에서 성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니 재처리 작업이 끝나 간다는 얘기 아냐. 예삿일이 아니네.

기자2 왜 그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해? 재처리 작업에 이르기까지의 마지막 준비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말이잖아. 우리말 몰라?

기자1 글쎄, 말이 너무 이상하잖어.

기자2 미국 헷갈리게 하려고 말을 비튼 거지. 곧 베이징에서 미국과 회담이 있잖아.

기자3 마침 정부도 폐연료봉 재처리를 위한 준비작업이란 뜻으로 해석했대.

기자2 그럼 그렇지. 베이징 회담에서도 북한이 미국 넘덜 가지고 노는 모습이 볼 만할 거야.

S#2 비슷한 시간 서울 무교동 뒷골목의 한 감자탕집

청년1 북한이 핵 무장을 하면 결국 우리가 핵 무장을 하는 거 아냐? 무궁화꽃이 어쩌고 하는 책도 있잖아.

청년2 북한의 선의를 어떻게 믿어?

청년1 그래도 북한은 한 핏줄이잖아. 미국과의 협상카드로 쓰고, 여의치 않더라도 고슴도치 전략을 쓰겠다는 거지.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라도 맹수는 얼마든지 잡아 먹을 수 있지만 발바닥에 상처 날까 두려워 그냥 간다는 식 아니겠어?

청년2 형제들도 장가 가고 나면 우애가 옛날 같잖은데 하물며 다른 나라로 존재하는데 무슨 핏줄이야?

청년1 그래도 언젠가는 북한과 통일해야 할 거 아냐.

청년2 좋은 이웃으로 지낼 수 있으면 되지 왜 꼭 한 집에서 살아야 해?

청년1 그럼 역사는 뭐 하러 있냐.

청년2 수없이 한 핏줄끼리 갈라지고, 다른 핏줄과 손 잡고 해 온 것이 진짜 역사야.

S#3 서울 한 대학의 고대사연구회 세미나

교수1 최근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고 있는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보아 4∼5세기 일본이 이 지역에 어떤 형태의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교수2 그 때는 일본에 고대국가가 출현하기도 전이고 7세기에 성립하는 야마토(大和) 정권조차 백제의 압도적 영향 하에 있었는데 말이 되는 소립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일제의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얘깁니까?

교수1 당시 일본의 지배층이 한반도, 이를테면 가야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조차 우리 역사에 포함되는 것 아닐까요?

교수2 글쎄, 우리 연구회가 그런 소릴 하고 학계에서 살아 남을 수 있겠어요? 없던 얘기로 합시다.

몇 년 전 일본 도쿄에서 만난 한 중견학자는 "유신정권과 5·6공 군사정권의 반공·냉전 이데올로기는 갔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이데올로기의 시대"라며 "민족 의식 앞에서는 어떤 사상도, 학문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개탄했다. 자유로운 사고를 먹고 사는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나와 남을 가르는 민족주의의 양분법 앞에서 질식할 수밖에 없다는, 수십 년의 강단 경험을 담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인식이 조금은 확산된 것일까. 최근 '민족'을 잣대로 한 역사 서술과 사회과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아직 바위에 계란 던지기 격이지만 그런 생각이 표출되는 것만으로도 길게 보아 패러다임의 붕괴는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학문·지식 세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운명을 끌고 가는 정책 결정자들이 혹시라도 '민족' 과잉증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정밀 검진이 필요한 때다. 빨간 색이건, 노란 색이건 색안경을 벗으면 세상이 훨씬 밝게 보인다.

황 영 식 문화부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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