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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고시원 대학" 방치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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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고시원 대학" 방치 말라

입력
2003.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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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대학이야? 완전히 고시원이지."늦은 나이에 미국유학을 떠났다가 이번 학기에 서울의 모 대학 사회과학대 교수자리를 잡은 친구는 최근 기자를 만나자마자 혀를 내둘렀다. 미국생활 10여년동안 이런 저런 채널로 전해 들어 고시촌으로 변해버린 한국 대학의 현실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접해보니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우리학과만 해도 3, 4학년 60여명가운데 단 2명을 빼놓고는 모두가 고시를 준비하고 있더라구. 대학원도 일단 군입대를 연기해보려고 들어오지 정작 학문을 하려는 학생은 거의 없어. 문과계열 교수들끼리 만나면 염불(전공학문)보다 잿밥(고시)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세태를 한탄하곤 하지만 사실 뾰족한 대책도 없거든."

대학 캠퍼스에 '고시광풍'이 거세다. 권위주의 정권시절 대학가를 휩쓸던 '민주화운동' 열기가 사그러들면서 불기 시작한 고시열풍은 이제 법대생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거의 모든 문과계열 대학은 물론 이공대쪽으로까지 확산되는 실정이다. 이 같은 풍조를 반영하듯 비법대생의 고시합격도 매년 늘고 있다. 서울대의 경우 2001년 사시 합격생 387명 가운데 법대생이 과반수가 넘는 214명을 차지했지만 사회대 63명, 인문대 34명, 경영대 27명 등 비법대생도 상당수를 차지했다. 심지어는 이과계열인 공대와 자연대에서도 각각 20명과 11명이 합격했다.

고시제도가 공무원조직에 능력 있는 법률·행정 전문가를 공급하는 제도로서 순기능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논두렁 출신'이 일거에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출세통로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때문에 요즘도 시골에 가면 '경축 ○○○군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유난히 '등과급제(登科及第)'를 통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숭상하는 유교적 전통에서도 기인하지만 고시만큼 일단 합격하기만 하면 평생을 보장 받는 가장 확실한 투자수단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공인회계사의 계산에 따르면 현재의 변호사 수요공급체계가 지속된다고 가정할 경우 늦어도 43세 이전에 합격한다는 보장만 있다면 사시공부를 하는 게 졸업 후 취직을 하는 것보다 남는 장사라고 한다. 사시준비생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르겠다. 하긴 2000년에 22.6대 1이던 사시경쟁률은 지난해 30대 1로 높아졌다. 그러나 이 같은 고시열풍의 뒷면에는 '기초학문의 고사(枯死)'라는 우울한 모습이 드리워져 있다.

인문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의 퇴조현상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학문의 존폐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인적자원의 거시적 관리를 전공한 경영학자들은 머리 좋은 학생들이 고시에만 매달리는 현실을 방치할 경우 우리사회의 균형적 발전은 암담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우수 두뇌들이 '창조적 학문'에도 눈을 돌릴 수 있도록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비록 흐지부지 되긴 했지만 YS정권이나 DJ정권 초기에는 법과대학원 설립 등을 골자로 한 사법개혁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인수위 백서 어디에도 왜곡돼있는 이 같은 법조인력 양성시스템을 고쳐보겠다는 내용이 없다. 새 정부가 '언론개혁' 등 소모적인 개혁 드라이브를 펴기보다는 국가인력의 효율적 안배라는 화두에도 신경을 썼으면 싶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하지 않는가.

윤 승 용 사회 1부장syy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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