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상에서였다. 그날 따라 파도는 드세, 높이가 자그마치 8m를 헤아렸다. 금강산을 그토록 보고 싶었건만, 나는 배에서 내리지 못 했다. 상륙조차 할 수 없었던 상태였다. 멤버 중 하루 종일 술병을 끼고 살았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가 금강산 보러 간다며 들떠 배에 오르기 전 권하는 술을 모처럼 들이켰던 게 화근이었다.옛날 몸이 아니었다. 악천후의 배위에서 술이 제법 들어가자, 마침내 속이 뒤집어졌다. 그리고는 계속 관광선 병실 침대에서 비몽사몽으로 있다, 눈을 떠보니 경희대 병원이었다. 전에 없던 현상을 당하고는 '풍'이 온 줄로만 알고, 한방과로 달려갔다. 다행스럽게도 '풍'은 아니었다. 신경외과에서 정밀 진찰을 받아 보니, 뇌속의 핏줄이 터져 피가 고이는 바람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판정이었다.
내가 술을 끊게 된 것은 그 사건 이후다. 하기사 주민등록상으로만 해도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55세·추정 나이 60세) 아니던가. 몸은 못 속인다. 고인 피를 뽑아 내는 수술을 받은 뒤, 20일간 입원해야 했다. 이후 변한 것은 술을 끊게 됐다는 사실 하나뿐만 아니었다. 멤버들끼리 만남이 뜸해지다보니, 급기야 그룹이 소리도 없이 깨지고 만 것이다. 서로간에 유대가 희박했던 탓이다.
그러나 16년만에 결심한 활동인데, 그것으로 그만 둘 수는 없었다. 1983년 이태원에 냈던 클럽 '라이브'의 무대에 자주 섰던 두 후배가 떠올랐다. 정성조, 신관웅, 유복성, 전인권 등 호화 멤버들 사이에서 말없이 성실한 연주로 무대를 빛내주던 두 친구다. 김영진(50·베이스)과 유상원(48·드럼).
한창 때 나는 워낙 바쁘기만 했던 탓에 뒷전에서 묵묵히 자기 음악만 하던 그들과는 제대로 대화 한 번 못 나눴다. 그러나 그 시절 열심히 하던 모습에, 말은 안 했지만 호감이 갔던 사람들이다. 동업자의 배반으로 거기서 쫓겨 나오다시피 했을 때, 당시 내가 살던 방배동 연립 주택 2층까지 드럼 세트 등 잡다한 짐을 옮겨주었던 그들을 나는 기억해 낸 것이다. 지금에사 하는 말이지만, 돌아서면 남이기 일쑤인 음악판에서 그렇게 인간적인 사람은 그 때 처음 봤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두 사람은 같이 해 보자는 나의 제의를 받고 단박에 승낙했다. 더군다나 일당으로 지급되는 낮은 개런티에도 개의치 않았다. 서로의 음악적 이해가 최우선 조건인 3인조 활동에서, 나의 음악을 듣고 자라났다 해도 좋을 두 사람과 트리오를 이룬다는 것은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든든함을 심어 주었다.
제 2기 '신중현 그룹'이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내지른 큰 소리가 99년 세밑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졌던 '너희가 록을 아느냐'이다. '비속의 여인'에서 '금강산'까지 나의 대표곡을 망라했던 그 무대를 위해 우리는 별다른 연습이 필요 없었다. 나의 곡을 너무도 잘 아는 두 사람은 내가 무슨 곡이든 전주만 시작하면 다 알아서 받쳐 주었다. 이들과 무대에 서면 너무 편하다. 내가 음악적 이상으로 꿈꿔 왔던 트리오 그룹의 꿈이 뒤늦게 실현된 느낌이다. 이 모두가, 라이브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년 뒤,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내 휴대폰으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는 전혀 예상 밖의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베를린이 차기(2006년) 월드컵 개최지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는 무대를 독일서 펼쳐줄 수 있겠느냐는 요지였다. 2001년 베를린 광장에서 1시간 동안 펼쳐진 일종의 합동 공연이었다. 뜻밖의 영광스런 제의였다. 거기서 후기 스콜피언즈와 함께 출연해 나와 그들의 히트곡들을 쭉 망라했던 공연은 국내 TV에서 하이라이트로 방영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일이 성사되는 과정에서, 나는 곤혹스런 경험을 해야 했다. '선생님의 명성을 익히 들었으니, 그 자리를 빛내달라'는 요지의 글에는 무대 장치나 필요한 장비 등 정작 공연에 필수적인 하드 웨어는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록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낙후돼 있었는 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 공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무수하게 국제 전화와 팩스가 오갔다. 내가 어떤 음악을 해 왔는 지에 대한 파악조차 안 돼 있는 것 같았다. 69년, 야외의 악천후 속이었지만 사흘간의 콘서트를 완벽하게 치러냈던 미국의 우드스탁 페스티벌과 자꾸만 어쩔 수 없이 대비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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