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개발 재개 의혹 파문이 일어난 지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미국과 북한이 중국과 더불어 베이징에서 3자 회담을 개최하고 있다. 한국이 제외되어 아쉬운 감이 없지 않으나 북한 핵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바람직한 진전이라 하겠다.이번 회담은 그 동안 닫혀있던 북미간 대화의 창구를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또한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은 최소한 사태의 악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대화 중도에 북한이 폐연료봉 재처리와 같은 악수(惡手)를 둘 수 없을 것이고, 미국 역시 경제 제재나 군사 행동이라는 강수를 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베이징 회담에서 큰 돌파구가 마련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북미가 서로 입장 차이를 재확인하고 의제와 대화 일정에 합의만 해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회담 기간에 미국은 '선(先) 북핵 폐기, 후(後) 실질 협상' 이라는 기본 입장을 고수하는 가운데 3자 회담을 한국과 일본이 포함되는 다자 회담으로 전환시키려고 적극 노력할 것이다. 반면에 북한은 북미 양자 대화를 강조하면서 미국이 불가침조약 체결을 통해 자국의 체제 안전보장을 해주어야 핵 포기 선언을 하겠다는 종래의 입장을 견지할 것이 분명하다.
더욱 우려되는 대목은 북한과 미국 모두 현안 타결을 위한 기본 자세가 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북한의 최근 행태를 지적할 수 있다. 베이징 회담 개최를 5일 앞둔 지난 18일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외교부 대변인의 발언을 인용해 북한이 "8,000여 개의 폐연료봉을 마지막 단계에서 성공적으로 재처리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발표가 엄청난 국제적 파장을 일으키자 조선중앙통신은 오역이 있었다면서 "우리는 마지막 단계에서 8,000여 개의 폐연료봉 재처리 작업을 향해 순조롭게 가고 있다"고 수정한 바 있다.
베이징 회담의 개최를 결렬시킬 뻔한 이 소동은 벼랑 끝 외교에 기초한 북한 협상행태의 기존 관행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역 문제와 관계없이, 민감한 회담을 목전에 두고 폐연료봉 재처리를 운운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다. 이러한 협상태도는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들의 입지만 강화시켜 북한 핵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어렵게 할 수 있다. 북한도 이제 변화된 환경을 보다 현실적으로 직시하면서 과거 협상의 관성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미국도 문제다. 지난 21일 뉴욕타임스는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김정일 정권의 축출만이 유일한 대안이며 이를 위해서 중국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비망록이 국방부 고위 관리들 사이에 회람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국방부 대변인이 보도 내용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기는 했지만, 이 같은 보도는 부시 행정부 내 신 보수주의파의 기류와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을 고립· 봉쇄하고 체제를 전환시켜야만 핵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체니, 럼스펠드, 월포비치 등 부시 행정부내 신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오래 전부터 제기됐던 것으로 새삼스러울 게 없다. 그러나 문제는 타이밍이다. 비록 미 정부의 공식견해가 아니더라도, 베이징에서 회담을 하자고 해 놓고 북한의 정권교체를 논의하는 회람이 나돈다는 것은 대화의 판을 깨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번 베이징 회담을 계기로 북한 핵 문제 해결의 윤곽이 잡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과 미국 모두 협상의 기본자세를 분명히 해야 한다. 폐연료봉 재처리라는 협상카드와 북한의 체제전환이라는 강성 논리 모두 현 사태의 평화적 타결을 어렵게 할 뿐이다. 이제 북한은 핵 포기 의사를 분명히 하고, 미국은 북한을 정당한 협상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기본 코드의 조율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문 정 인 연세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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