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두었다가 사들고 와서 책꽂이에 꽂아놓거나 책상 위에 두고 가끔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한 기분이 드는 그런 책이 있다. 읽지 않아도 좋다. 그냥 그 책이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정신은 감응한다. 그때 책은 하나의 오브제가 된다. 책에 쓰여진 문자나 내용보다는, 책이라는 사물 자체가 하나의 미학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조각가 최은경(48·사진)씨가 경기 파주시에 건설돼 막 출판사 등의 입주가 시작된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내 한길아트스페이스에서 19일부터 6월19일까지 여는 '책, 성과 속의 세계'는 온전히 책을 모티프로 한 책 조각전이다. 최씨는 지난해 8∼10월 이탈리아 베니스건축비엔날레 국제조각·설치전에 한국 작가로는 처음 참가했다. 출품작은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저서 제목으로 이름을 붙인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든 거대한 책 형태의 설치 'The Sacred and the Profane'(성과 속). 당시 본보에 보도된 최씨 기사를 본 김언호 도서출판 한길사 사장은 최씨에게 파주출판단지 신축 사옥의 조형물 제작을 의뢰했고, 그 과정에서 책 조각 전시까지 이뤄진 것이다.
역시 외형이 네 권의 책을 꽂아놓은 형상인 한길아트스페이스 전시장은 최씨 작품이 뿜어내는 '책 냄새'로 가득하다. 스테인레스, 강철, 세라믹, 점토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책들이 누웠거나 서 있고, 회전문처럼 밀고 들어갈 수 있거나, 물에 잠겨 조명을 받고 있기도 하다. '禁書(금서)' 'Lies(거짓말)' '한국인'이 있고, '윤리와 모럴'도 있고 '자물쇠가 채워진 책'도 있다. 거울처럼 보는 이의 모습을 비쳐주는 책이 있는가 하면, 하얀 새가 책 위에 누워 새장 같은 상자 속에 갖힌 오브제도 있다. '반폐쇄회로' 연작은 펼쳐진 책 위에 끈적한 점액질이 말라 엉겨 붙은 형태로, 책에 담긴 고통스런 인간정신의 역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왜 책일까. 최씨는 한 마디로 "거짓말 좀 안하고 살자구요"라고 알듯모를 듯한 말을 한다. 그는 4년쯤 전부터 이 작업에 몰두해 왔다. 2000년 예루살렘 이스라엘뮤지엄에서는 성서로 상징되는 책을 파괴하는 내용의 설치작업을 해 호평받았고 미국 아리조나주립대에 소장됐다.
애서가로 이름난 원로 서양사학자 이광주씨는 최씨의 작품을 보고 "책이 베풀어주는 놀이, 작품에서 나오는 서권기(書券氣)에 조형 표현이 언어 표현에 한 수 앞선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언호 한길사 사장은 "한 권의 책이 내용과 형식, 지성과 미학이 같이 어우러져야 하는 축제라고 할 수 있다면, 최씨의 책 조각전은 파주출판단지 벌판에서 벌어지는 지성과 미학의 축제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책과 미술, 음악이 함께 하는 자리로 만들겠다는 그는 "대학이나 각급 학교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 공간마다 이런 오브제들이 놓여 책의 의미를 느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출판인다운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전시 문의 (031)955―2000
/하종오기자 joha@hk.co.kr
사진 원유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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