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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죽도록 사랑해' 소품담당 허표영, 진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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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죽도록 사랑해' 소품담당 허표영, 진경현

입력
2003.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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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그 시절엔 저런 게 유행했지." "우와, 저게 뭐야? 왕 촌스럽다."그 시절을 살았던 세대를 아련한 추억에 젖게 하고, 젊은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대극 속의 '골동' 소품들. 시청자들은 '옥에 티'를 찾아가며 '시간 여행'을 즐기지만, 좀더 실감나는 여행을 위해 소품 담당자들은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전쟁을 치른다. SBS 월화드라마 '야인시대'에 소품을 대는 (주)운곡프로비전 허표영(60) 사장과 MBC 주말연속극 '죽도록 사랑해'의 소품팀장인 MBC미술센터 진경현(45) 과장을 만나 소품에 얽힌 뒷얘기와 애환을 들어봤다.

요즘 시청자에 '적당히' 안통해

진경현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 선배님에게서 한 수 배워가야겠어요.

허표영 무슨 말씀. 가진 거라곤 경험뿐인 우리보다 순발력 뛰어난 젊은이들이 낫지.

진경현 하면 할수록 더 어려운 게 소품 일인 것 같아요. 특히 시대극은 사극이나 현대극보다 물건도 귀하고 시청자들이 대부분 그 시절을 살았던 분들이라 여간 어렵지 않네요.

허표영 맞아. 요즘 시청자들은 워낙 눈이 높아 '적당히'가 통하지 않아. 70년대에는 대궐 잔치 장면 찍을 때 10여가지만 진짜 음식을 차리고 나머지는 모형을 썼는데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지. 옛날 얘기 나온 김에 재미난 일화 하나 들려줄까요. '여로'란 드라마 찍을 때 한 출연자가 술에 취해 소품으로 쓴 가짜 돈으로 술값을 치렀다가 남대문경찰서에 끌려 갔어. 실수로 밝혀져 금방 풀려났지만.

진경현 시청자들의 눈은 정말 무서워요. 얼마 전 고등학교 음악수업 장면에 중학교 음악이 나오는 바람에 네티즌들에게 항의를 받고 진땀을 뺐어요. 원래 책 표지는 안 잡기로 해서 그 시절 불렀던 노래 악보 구하는 데만 신경을 썼는데 카메라 위치가 바뀌는 바람에 딱 걸린 거죠.

허표영 우리도 2주 전쯤 방송된 경찰서 장면에서 벽에 써 붙인 '질서유지' 한자가 틀려 혼났어. '秩序維持'를 '秩序有志'로 썼거든. 편집 과정에서 발견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지.

철저한 고증작업은 기본

진경현 '죽도록 사랑해'는 불과 30년 전인 1970년대가 배경이라 쉽게 생각했다가 정말 고생했어요. 서울시내 재활용품 센터를 죄다 뒤져도 그 시절 가구 한 점 없고, 약국과 가게 진열장 채우느라 제약회사, 식품회사에 다 알아봤는데 사진만 있지 실물이 없대요. 황학동 시장에서 약병을 간신히 구해 이미테이션 뜨고, 삼양라면 봉지도 회사에 딱 하나 남았다는 걸 빌려다 복사해 썼어요. 미제 화장품이나 양담배, 영화 포스터 등을 만드느라 신문철과 '선데이서울' 등 잡지를 지문이 닳도록 뒤졌죠.

허표영 일제 때부터를 다룬 '야인시대'도 만만치 않지. 자잘한 소품은 대부분 일본에서 사다 썼어요. 인력거 마차 우편수레 등은 옛날 사진을 구해 일일이 고증을 거쳐 만들었고. 우마차는 수소문 끝에 이천에 사시는 80대 어르신을 찾아 만들었는데, 이런 분들 돌아가시면 어쩌나 걱정이야.

진경현 시간만 충분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만들 텐데 대본이 늦어 소품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때가 많아 속상해요. 빨리 사전제작 시스템이 정착돼야 해요.

허표영 맞아. 그날 녹화할 대본이 아침에야 나오기도 하니 어쩌겠나.

진경현 영화쪽은 사정이 낫더군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꽃잎' '취화선' 등의 소품 일에 참여했는데 시간 여유가 많아 정말 신나게 일했어요. '전태일'에서 피복공장 전깃줄에 앉은 먼지까지 만들고, '꽃잎'에서는 광주 금남로를 빌려 5·18 현장을 멋지게 재현했죠.

허표영 그게 다 방송에서 촌각 다퉈가며 쌓은 노하우 덕 아닌가요. 한국 영화가 이만큼 발전하는 데 방송 소품인들의 역할이 컸다고 자부할 만해요.

쓸만한 고물은 일단 사는 버릇

진경현 저는 아이디어가 안 떠올라 답답할 때 황학동을 찾아요. 오늘도 새벽부터 황학동을 뒤져서 천일 전축, 세이코 카세트녹음기 등 500만원 어치를 샀어요. 남들에게는 '고물'도 우리에겐 '보물'이죠.

허표영 횡재했네. 나도 쓸 만하다 싶은 물건이 눈에 띄면 당장은 필요 없어도 사 들고 오는 게 버릇이 됐지. 그렇게 모은 것이 종류만 2만 종이 넘어 1,000여 평 창고가 모자랄 지경이에요. 진짜 귀한 물건들로 멋진 박물관 하나 세우는 게 꿈이지. 강화도에 터를 물색 중이에요.

진경현 정말 멋진 계획이네요. 저는 그 동안 쌓은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고 싶어요. 회사 동료들과 작품별로 작업 결과를 모아 CD를 만들고 있어요. 후배들은 좀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요. 드라마 한 번 맡으면 아예 짐 싸들고 나와 사무실 한 구석에서 눈 붙이며 몇 달을 버텨야 하잖아요. 그렇다고 대우가 좋나요. 금세 지쳐 그만 두는 후배들이 많아 정말 가슴이 아파요.

국내외 발품 힘들지만 재미

허표영 돈 생각 안하고 좋은 작품 만들자는 게 신조지만 그래도 속은 상해요. 소품업체로는 제일 크다는 우리 회사가 간신히 현상유지하는 정도이니. 그래도 절대 후회는 안 해. 큰 아들도 10여년 전 건설회사 그만 두고 함께 일하고 있어요. 애써 만든 소품이 TV에 멋지게 나오면 피로가 한 방에 풀리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이 직업의 매력 아닌가.

진경현 마치 마술쇼를 하는 기분이죠. '안되면 되게 하라' 그게 우리 신조지요. 잘못한 거 콕콕 찍어내는 시청자들이 때론 야속하지만 그만큼 애정이 있다고 생각하면 고맙죠. 좀 미흡해도 예쁘게 봐주었으면 좋겠어요.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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