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만 더 우승하고 유니폼을 벗어야할 것 같아요."불혹을 앞둔 나이에 팀을 프로농구 챔피언에 올려놓은 '농구9단' 허재(38·TG)는 요즘 연일 시상식과 축하연에 불려 다니느라 챔피언결정전 때 보다 더 바쁘다. 허재는 챔피언결정 5차전에서 갈비뼈 연골을 다쳐 큰 소리로 말하기도 힘든 상태. 하지만 축하연에 참석하느라 우승 이후 한번도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다. 마침내 우승했다고 환호성을 지르는 부인 이미수(37)씨와 초등학생 두 아들 웅(11) 훈(9)에게도 아빠로서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그래도 가족들은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국 최고의 승부사이기 때문이다.
'일년 더 선수로 뛰겠다'
허재는 최근 선수생활을 일년 더 연장하기로 마음을 다 잡았다. 정확히 말하면 챔피언반지를 한 번 더 끼겠다는 욕심이다.
내년이면 농구 인생 30년째. 허재는 이제 지도자 준비를 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주위의 물음에 "이 나이에도 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또 후배들이 내가 코트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을 뿌리칠 수 없어요"라고 대꾸한다. 자신에게 우승반지를 선물한 후배들에게 이제 거꾸로 자신이 우승반지를 선물하고 싶은 것이다.
허재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을 챔피언에 등극하던 이달 13일을 꼽는다. 가장 큰 복은 중앙대 14년 후배 김주성(205㎝)이 TG에 입단한 것이다. "주성이가 플레이오프 MVP를 받기를 바랬어요. 잭슨이 수상자로 결정됐을 때 아쉬웠죠." 김주성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허재는 1년 더 뛴 뒤 미국으로 농구유학을 떠나 본격적인 지도자수업을 쌓을 계획이다.
트레이드마크 '보약과 술'
허재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술이다. 지금도 말술에 담배를 하루 2갑 가까이 피는 허재는 다른 많은 주당 처럼 수많은 일화를 갖고 있다. 1990년 아르헨티나 세계선수권 때 현 김진(42) 동양 감독과 한방을 쓸 때였다. 김 감독은 술을 못하는 데다 원칙주의자로 통한다. 그런 대선배와 방을 함께 쓴 허재가 술을 마음 놓고 마실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안 마실 허재가 아니었다. 매일 밤 1,2시간 밖에 나가 술 냄새를 팍팍 풍기며 들어와 잤다. 이를 수상히 여긴 김 감독은 잠겨 있던 서랍장을 열어봤고 그 안을 가득 메운 팩소주에 기겁하고 말았다. 김 감독은 "당시 유럽 남미선수들을 상대로 겁없이 레이업을 뜨는 선수는 허재밖에 없어 야단칠 수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허재는 "대선배 앞에서 어떻게 술먹는 모습을 보여요. 그래서 상당히 조심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술을 즐기는 그지만 한편으로는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 허준(76)씨가 해주는 보약(뱀)으로 체력을 길렀다. 지금은 어떠냐는 질문에 "비밀입니다"며 웃어 넘긴다.
화끈한 성격의 진짜 남자
허재는 동양과의 챔프 6차전 종료 1.3초전 코트에 나섰다. 그는 "대포주사(진통제)를 맞아도 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창진이형(그는 전창진 감독을 형이라고 부른다)의 배려도 있었고 나도 팬들을 위해 우승순간 코트에 서 있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우승순간을 코트에서 맞은 1.3초는 허재에게 영원한 추억이 됐다.
허재는 화끈한 성격이다. 말을 거침없이 하고 행동이 투박해 일견 난폭해 보이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진짜 사나이'라고 평한다. 그는 며칠전 코치모임을 앞두고 한 코치가 "한 턱 내야지"하자 카드를 내보이며 바로 "(나는 다른 일정으로 참석못하니까)계산서만 보내 주세요"라고 답했다. 허재는 "내년 시즌 주전가드 신기성의 복귀로 샐러리캡 부담이 있는데"라고 묻자, "나는 기아시절부터 내가 연봉을 주장한 적이 없어요. 신경 안씁니다"고 잘라말했다. 한마디로 백지위임이다. 한가지 목표를 정하면 나머지 것은 곁가지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허재는 요즘 큰아들이 농구를 하고싶다고 졸라 고민중이다. 농구를 시키려면 지금(초등학교 5년) 보다 늦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잘 할지 못할지는 두고 봐야 알겠죠"라는 허재는 그러나 큰 아들이 '농구대통령'의 대를 이어주기를 내심 바라는 눈치였다.
/이범구기자 goguma@hk.co.kr
● 프로필
-생년월일 : 1965년9월28일 강원 홍천
-신체조건 : 188㎝ 88㎏
-가족 : 부인 이미수(37)씨와 2남
-학력 : 상명초―용산중―용산고―중앙대
-국가대표 경력 : 85∼99년
-소속 : 기아자동차―부산기아―원주TG
-수상경력 : 농구대잔치 MVP(91,92,95)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MVP(97∼98) 프로농구 베스트파이브(99∼2000) 프로농구 대상(일간스포츠, 스포츠투데이·2002∼03) 프로농구 모범선수상(2002∼03)
■친구 이민형코치가 본 허재
허재는 소탈한 성격답게 친구와 지인이 꽤 많다. 그 중에서도 용산중·고 동창인 이민형(38·삼성 코치·사진)과 가장 절친한 사이다. 중학교 때 처음 만나 지금껏 우정을 유지해 오고 있는 둘은 "누가 뭐래도 우리는 통하는 사이"라고 말한다. 이민형 코치의 뇌리에 허재는 한마디로 배짱과 근성 있는 선수로 남아있다. 이 코치는 "허재는 절대 겁먹지를 않아요. 또 지고는 못 참는 성격이죠"라면서 "지금껏 현역생활을 하는 것도 다 그 근성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용산중에 나란히 입학하면서 둘은 대번에 서로를 '물건'으로 알아봤다. "허재가 가드를 봤고 내가 센터를 봤어요. 그리고 한만성(작고) 이삼성 김형균으로 베스트 5가 구성됐죠. 이 멤버는 용산고까지 고스란히 이어져 거의 모든 대회를 평정했지요." 이 코치가 처음 본 허재는 드리블과 슛, 패스가 모두 뛰어났지만 체력이 조금 약했다. 또 180㎝대의 이 코치에 비할 수 없이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이를 걱정한 허재의 아버지가 뱀을 일년에 두차례씩 달여먹여 고교때 이 코치에 맞먹는 덩치로 성장했다고 한다. 둘은 각각 고려대와 중앙대로 진학하면서 '적'이 됐지만 우정 만큼은 더욱 돈독해 져 툭하면 전화를 하고 가끔 안암동 꼬치집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대학시절 3년 내내 지다가 4학년 때 허재를 한 번 이긴게 전부"라는 이 코치는 "내 앞에서 마구 뜨는 데 희한하게 체공시간이 길어 잘 안 찍혔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타고 난 선수라는 것이다.
근성이 남다른 허재의 싸움실력은 어떨까. 알려진 바로는 군 출신 아버지에게서 권투를 사사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허재가 싸우는 것을 이코치는 본 적이 없단다. "눈만 부라리지 쟤는 안싸워요".
"주량은 누가 더 센가요?"하고 물었다. 허재가 "민형이 한테 안되요"라고 말하자 이 코치는 "양주 한병 정도죠. 뭐. 대병으로"라고 농친다.
허재가 마침내 우승을 일궈내자 바로 전화를 걸어 축하했다는 이코치는 "허재는 최고의 선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이범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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