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金炯旭·40) 청와대 제도개선비서관은 5년 2개월째 청와대 생활을 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에도 5년 내내 청와대에서 일했다. 1998년 국정상황실 사회담당 과장에서 시작해 정책기획수석실 정책담당국장, 기획조정국장, 시민사회비서관 등을 거쳤다. 말하자면 'DJ 맨'이었다. 그러던 그가 비서관급으로는 윤석중 해외언론비서관과 함께 전 정부 출신으로 새 정부 청와대에 남게 된 두 명 중 한 명이 됐다.그가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말. IMF 사태가 벌어진 뒤 노사정위원회가 태동하고 있었고 국민회의 부총재였던 노 대통령은 부당노동행위근절특별위원장으로 노사정위 발족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때 김 비서관은 DJ의 재야·청년 담당 비서로 노 대통령의 특위를 지원했다. 98년 현대자동차 파업 해결을 위해 노 대통령이 울산에 갔을 때도 그는 노동자들과의 막후 교섭 임무를 띠고 현장에 함께 있었다. 노동 현장은 노 대통령과 그를 이어준 연결고리이다.
김 비서관은 공무원들의 행정 편의주의, 불합리한 제도 때문에 생기는 국민의 불편을 다독이고 제도의 합리적 개선을 모색하는 자신의 업무를 노 대통령의 큰 개혁에 견주어 작은 개혁이라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은 해양부 장관 시절 민원인을 직접 만나 제도적 조정을 시도하곤 했는데 이제 그 일을 우리가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해 그는 누구보다도 훨씬 크게 월드컵의 감동을 느꼈다. 청와대 월드컵 지원팀의 실무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모든 준비과정이 그의 손을 거쳤고 IT·문화 월드컵의 개념을 제안한 일, 적은 비용으로 전광판 중계를 성사시켜 폭발적인 거리 응원의 토대를 마련한 일 등은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 뿌듯하게 남아 있다.
그는 다른 젊은 측근들처럼 386 운동권 출신이다. 고려대 정외과 82학번으로 총대의원회 의장, 정경대학 학생회장을 지냈고 투옥된 적도 있다. 대학 졸업 후에는 프레스 공장, 가구 공장 등 노동현장에 투신하기도 했다. 95년 국민회의 창당 때 운동권 동료의 권유로 당시 김대중 총재의 비서로 발탁되면서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번에 새 정부 참여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는 두말없이 미국 유학의 뜻을 접었다. 본격적인 정계 진출에 대해 그는 "지금은 하는 일에 충실할 뿐"이라고 말한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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