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오 지음 창작과비평사 발행·5,000원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에서). 그 후로 23년이 지났으며, 하종오(49·사진) 시인은 열번째 시집 '무언가 찾아올 적엔'을 펴냈다. 첫 시집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의 문제의식은 지금껏 놓지 않았으되, 최근 시 '하늘눈'의 한 구절처럼 '수직으로 보이던 내가 오늘은 수평으로 보인다.'그만큼 깊다.
하씨가 강화도에 자리잡은 지 10년이 넘었다. 많은 시에는 흙이 묻어 있고 꽃나무 향기가 배어 있다. 초봄 어느날 가만가만 산에 숨어들어 산수유 한 그루 뿌리를 뚜둑뚜둑 들어냈는데, '산에 있던 모든 산수유들 아픈지 파다닥파다닥/ 노란 꽃망울들 터뜨렸다.'('초봄이 오다'에서). 외지 떠돌다가 돌아온 아들놈이 꿰차온 며느리를 붙들고 시어미가 콩 심는 법을 가르치고('시어미가 며느리년에게 콩 심는 법을 가르치다'), 손이 부러진 아비는 개인택시 하는 아들놈을 불러다가 이것저것 시키느라 입으로 농사를 짓는다('아비는 입으로 농사짓고 아들놈은 손으로 농사짓다'). 꽃나무의 가르침은 그의 시처럼 깊다. 서울 콘크리트집 마당에 있는 산초나무를 캐어다 시골 텃밭에 옮겨 심었더니 나무가 말라죽었다. '무언가 찾아올 적에는 같이 살자고 찾아온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다시 캐어 서울 콘크리트집 마당에 옮겨 심었다.'('무언가 찾아올 적엔').
그러나 역시 무엇보다 울림이 큰 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다. 변한 세월을 노래할 때 시인은 아프고 쓸쓸하다. 정희성 시인의 표사처럼 "여기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혁명은 굶주린 자신들의 배를 채워주지 못한다며/ 재빨리 제도권이 된 친구들에게서도 너는 밀려났다/ 돈이나 상품이 된 사람들이 내지르는 환호만/ 왁자하게 뒤덮이던 도시에서도 너는 밀려났다/ 갖은 저항들이 속속 갖은 권력으로 탈바꿈하던/ 이율배반을 잊지 못해 잊지 못해 들길만 밟다가 다시 십여 년,/ 들녘에서도 너는 밀려났다 자진해서'('이십여 년'에서).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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