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외 지음 생각의나무 발행·1만2,500원
"우리는 모든 마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조국을 위해 죽은 자들에게 바친' 우스꽝스러운 기념비들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탈영자들을 위한 기념비들을 세우길 원한다. 탈영자들을 위한 기념비들은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대표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 모두는 전쟁을 저주하면서 그리고 탈영자들의 행복을 부러워하면서 죽어갔기 때문이다. 저항은 탈영에서 태어난다." 계간 '당대비평'의 특별호로 나온 '탈영자들의 기념비'(부제 '한국 사회의 성과 속―주류라는 신화')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공저 '제국'에 인용된 이 구절에서 기획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왜 굳이 애국자와 영웅들의 거룩한 기념비를 쓰러뜨리고, 거룩함의 이름으로 규탄받거나 아예 존재조차 무시돼 온 탈영자들의 기념비를 세우려고 하는가. 김진호 당대비평 편집주간은 "이름 없이, 말도 없이 사라져간 탈영자들의 기념비를 통해서" 우리가 집단적으로 '오인(誤認)'하고 있는 가치를 재검토, '새로운 구원'에 이르는 길을 모색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집단적 오인'으로 지목 받는 것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가족주의, 성공주의 등 우리 사회의 근대가 만들어 낸 거룩한 신화들 혹은 규범적 가치들이다. 이를 위해 국가·어머니·성도(聖徒) 등 '거룩한 주체들의 멜로드라마'를 파헤치고, 그러한 거룩함의 이름으로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이 어떻게 짓눌리는지 드러낸 다음 병역 거부자·매춘 여성·동성애자·빈민·외국인 노동자 등 주류 궤도 바깥의 탈영자들을 돌아본다.
이 삐딱하고 위험해 보이는 시도에 동참한 필자는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신형기(연세대 국문과 교수), 서동진(게이 활동가), 박형준(동아대 사회학과 교수), 정희진(경희대 여성학 강사) 김두식(한동대 법학과 교수) 등 소장학자와 운동가들이다.
박노자의 글 '국민이라는 이름의 감옥'은 국민의 의무를 강조하는 국가주의의 전근대성을 비판한다. 그는 이러한 '국민' 담론의 뿌리를 구한말 개화사상가 유길준의 국민론에서 찾아낸다. 유길준은 말했다. "법률은 수(帥)이며 권리는 졸도(卒徒)이니 졸도가 수의 명령과 절제를 불수(不遵)할딘대 졸도의 본분을 불수(不守)한다 위(謂)할디나…" 국법을 지켜야 국민이라는, 유길준의 국가 지상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양심적 병역 거부는 양심이 아니다. 이런 논리에 따라 국민의 단결을 방해하는 '우리 속의 타자들'을 왕따하는 관행이 군사주의·팽창주의·배타주의를 낳으며 오늘날 한국사회를 커다란 병영이자 감옥으로 만든다는 것이 박노자의 지적이다.
이 책에서 가장 도발적인 격문은 신학자 이정희(성공회대 외래교수)의 '결계(結界)의 폭력'일 것이다. 스스로 거룩한 무리 곧 '성도(聖徒)'를 자처하는 기독교인들의 배타성과 폭력성을 맹공하는 글이다. 그는 신의 이름으로 구원과 진리를 독점하고 심판과 사면을 대행하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 정권이 정당하든 말든 권력자들을 축복하고, 도그마적 열정으로 사회적 이슈에 뛰어들어 전투에 나서는 성도들의 행태를 가차없이 비판한다. 최근 기독교인들이 대규모로 벌였던 미군 철수 반대 시위를 그는 다음과 같이 욕하고 있다.
"도대체 '신성한 것(?)'이 왜 오늘 우리의 거리에서, 장터에서 활개치는가? 시도 때도 없이! …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것은 시청 앞 광장에서 '독수리' 오형제가 날아오기를 통성으로 기도하고,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목메게 부르며, 'In God We Trust'가 명문으로 낙인된 화폐(달러)를 물신화하는 제국주의 미국 고무 찬양 예배 푸닥거리다."
신형기는 4·19혁명이나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그가 어떻게 죽었든 상관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친 의로운 유공자로 기리는 과잉 민족주의를 꼬집는다. 우연히 시위 현장을 지나다가 영문도 모른 채 죽은 소년까지 영웅들의 기념비에 새김으로써 영웅이 아닌 이탈자들의 존재를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끝없는 희생으로 요약되는 거룩한 모성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고발한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자식을 위해 참고 견딜 것을 강요하는 어머니다움의 신화는 억압의 장치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권명아는 가족은 사회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라는 통념이 잔인한 이데올로기임을 밝힌다. 대구 지하철 참사 등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유족들이 최종적 문제 해결을 떠맡게 되는 상황을 보면서 그는 '신성한 가족'이라는 안전지대가 국가를 유지하는 마지노선으로 '동원'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박형준은 '진리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지식인의 오만을 경계한다. 그는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늘 무게를 두며, 나르시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실천적으로 구성해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지식인"을 주문한다.
이 책은 거룩하게 기려져 온,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주류 가치에 흠집을 낸다. 의심할 바 없는 것으로 믿어져 온 그런 규범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권리를 억압하고 왜곡하는 집요한 장치임을 드러낸다. 탈영자들의 기념비를 세우자는 이 책의 제안은 주류의 신화에 던지는 도전장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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