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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6월항쟁까지]<2> 6·3 사태(中)- YTP폭로와 린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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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6월항쟁까지]<2> 6·3 사태(中)- YTP폭로와 린치사건

입력
2003.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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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사흘 뒤 시위 주동자 중 한명이 자신이 입원한 병원으로 기자들을 불렀다. 그는 "대학내 프락치 조직을 폭로한 이유로 괴한들에게 끌려가 심야에 린치를 당했다"고 말했다. 이른바 'YTP폭로와 린치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29일 사표를 제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학생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직접 대화'를 모색했다. 그러나 반정부 시위는 더욱 거세졌고, 6월 3일 계엄령이 발표됐다.64년 5월 24일자 한국일보는 'YTP 暴露(폭로)에 린치 報復(보복)'이란 기사를 사회면 톱으로 실었다. "20일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낭독한 서울대 정치학과 3년 송철원(宋哲元·23)군은 21일 자정 지나 중부경찰서 직원을 자칭하는 청년 4명에게 산 속 외딴 건물로 납치당해 약 2시간 동안 발길로 차이고 담뱃불로 지져지는 등 심한 린치를 당했다고 폭로했다. 송군은 서울대 학원사찰조사위원장으로 YTP의 내막을 폭로한 학생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와 현재 에듀TV 회장인 송철원씨의 증언을 종합하면. '장례식' 행렬이 가두진출을 시도하자 송군은 다른 시위 주동자들과 함께 학교 뒷담을 넘었다. 장충동에 있는 친구에게 갔다. 막 잠이 들었는데 문 밖이 소란하더니 청년 4명이 방으로 들이닥쳤다. "중부서에서 왔다. 왜 왔는지 알고있지?" 밤 12시 40분쯤이었다. 검은색 지프차는 중부서에 잠시 들렀다가 퇴계로 쪽으로 향했다. "송철원 잡았다. 인계해가라"고 무전을 쳤다. 검은색 새나라 승용차로 바꿔 탔다. 다른 4명의 청년이 있었다. 뒷 좌석 시트에 머리를 쳐박혔다. 10여분 오르내리다 남산 중턱 길에 멈췄다. 창고 같은 곳으로 끌고 갔다. 발길질이 시작됐다. 손전등으로 얼굴을 비추며 "YTP 애들을 왜 쫓아냈느냐, 네가 뭔데 국가기관을 상대로 싸우느냐" "여기에 구덩이 파고 묻어버리면 그만이다" "우린 경찰하고 달라" 등의 말이 들렸다. 기절한 척 했다. 담뱃불로 손등을 지졌다. 비명을 질렀다. 더 많은 매가 돌아왔다. 진짜로 실신했다. 얼마 후 찬물을 끼얹으며 "이 자식 죽어버리면 골치 아픈데"하는 말이 들렸다. 새벽 3시 반쯤이었다. 그들은 송군을 경찰병원에 입원시켰다가 동대문서로 데려갔다. 장례식 자금과 동료의 행방 등을 물었다. 22일 영장을 신청했으나 기각되자 밤 11시 반쯤 귀가 시켰다. 송군은 아버지가 원장으로 있는 교통병원(현 철도병원)에 입원했다. 이튿날 송군은 기자들을 병원으로 불렀다. YTP사건의 전모를 자료와 함께 샅샅이 공개해버렸다.

64년 4월 들어서면서 학교 내 프락치에 대한 소문이 흉흉했다. 송군이 이에 대한 조사를 맡기로 했다. 누군가 만나자고 해서 법대 앞 낙산다방으로 갔다. 중앙대 재학생이라고만 소개한 그는 한 가방 가득 서류뭉치를 내 놓았다. "이런 걸 조사한다고 들었는데, 알아서 처리하세요." 서류를 읽어보다 깜짝 놀랐다. YTP(Youth Thought Party 靑思會)라는 제목이었다. 미행, 접선, 교살에 대한 내용, 교살을 자살로 위장하는 방법 등도 있었다. '생명을 걸고 비밀을 지킨다' '배신할 때는 목숨을 바친다' 등의 입회서약서도 있었다.

YTP는 63년 10월 대통령선거 당시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 후보에게 "YTP라는 괴조직의 실체를 밝혀라"고 요구하고, 이후 국회에서 논란이 돼 '어용 비밀 폭력단체'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송군은 학원사찰조사위원회를 만들었다. 아버지가 공안검사인 친구 집에 본부를 설치했다. 안전과 보안을 위해서였다. 문건에 나오는 관련자들을 불러 입회서약서 등을 들이밀며 추궁했다. 그들은 '본인의 진술은 사실이다'는 각서와 함께 진술서를 썼다. 조사위원회는 '개인적 신상과 관련된 사안은 죽을 때까지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 주었다.

조사 결과 4·19 직후 일부 극우 인사들이 KKP(구국당)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는 이후 MTP(문맹퇴치회)로 변신했다. MTP는 5·16 이후 청년과 대학생을 대거 흡수, YTP로 이름을 바꾸고 중앙정보부의 후원과 지휘 아래 학원사찰 업무를 분담하고 있었다. 4월 23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학원사찰 성토대회'가 열렸다. 송군은 그 동안 조사해온 YTP의 실체를 폭로했다.

린치사건 이후 특별조사단을 구성한 서울변호사회는 26일 "전 YTP회원인 김모(서울대 정치학과 재학)가 송군의 숨은 곳을 알려주었다. 4명의 괴한은 모 기관원"이라고 발표했다. 29일 오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박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박 대통령은 6·3 계엄령이 발표된 다음날 사표를 반려했다). 30일 오후 중앙정보부 서울지부 이모 박모 송모 수사원이 서울지검에 나타났다. 이들은 "서울지부장의 권고로 자진출두 했다. 자꾸 버티길래 때렸다"고 말했다. 6월 8일 이들 3명은 직권을 남용한 '가중상해죄'로 구속기소됐다.

정병진 편집위원

● 당시 학원사찰조사위원장 송 철 원씨

YTP 관련자는 서울대 문리대에도 20여명 있었다. 학생회 간부도 있었다. 신상을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일부는 정치권의 '알만한 인사'가 되기도 했다. 학생 시절의 일이므로 덮어둘 수 있다. 그러나 뒤늦게 6·3의 주역이라고 매명(賣名)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최근 6·3 동지회 모 간부로부터 증언을 들었다. "63년 초 여자 친구로부터 YTP 자료를 입수해 야당 쪽에 전해줬다. 그녀의 오빠가 YTP 보스였다. 모대학 간부였다. 그녀와 함께 오빠가 지휘하는 훈련캠프를 방문한 적도 있었다. 관악산 기슭이었다."

난 부르주아였다. 친구들이 프로레타리아였다. 친구들은 6월 3일 린치사건으로 병원에 있던 나를 들것에 싣고 광화문 시위에 나섰다. 계엄이 선포되고 도피가 이어졌다. 장충동에 있던 야당 의원 유모씨 집으로 갔다. 가정교사를 했던 집이었다. 부인이 곤란하다며 돈을 얼마 주더라. 고교 동창인 배순훈(전 정통부 장관) 집으로 갔다. 그의 부친이 반겨주었다. 계엄해제(7월 29일) 소식을 듣고 학교에 갔다. 아버지(당시 교통병원 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9·28 수복 때 급히 나와서 만세 불렀던 사람들 모조리 죽었다. 꼼짝 말라"고 했다. 아버지를 기다리다 낯익은 형사와 마주쳤다. 학장님께 인사드리고 경찰에 출두하려 한다고 둘러댔다. 학장실 창문으로 뛰어내려 뒷담을 넘었다. 도망가다 보니 오후 2시 뉴스가 나왔다. "송철원이 검거돼 동대문경찰서로 압송 중이다"고 했다. 나를 기다리던 형사가 '송철원 검거'를 미리 보고했던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두울 것이라는 생각에 집으로 갔다. 마루에 구멍을 뚫어 그 밑에서 지냈다. 어느날 밤 대문 밖에서 "교통병원에서 왔다"는 고함이 들렸다. 아버지가 대문을 여니 2∼3대의 자동차가 한꺼번에 헤드라이트를 비추었다. 2시간 가까이 집안을 뒤지다 갔다. 9월에 접어들면서 학생들에 대한 유화정책이 펴졌다. 동대문서에서 "나와서 조서나 한 장 써라"고 연락이 왔다. 어떻게 집에 있는 줄 알았느냐고 물었다. 미국에 있던 형님이 나에게 안부전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도청했다고 하더라. 그나마 낭만이 있었다.

66년 건국대학원의 학생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가 입학했다. 68년부터 경제학과 대학원에서 강의를 맡았다. 취업반 대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부업도 했다. 이것이 나중에 나의 천직인 학원강사의 거름이 됐다. 아버지가 일하는 교통병원엔 걸핏하면 감사를 나왔다. 약값을 떼 먹었다며 알약의 개수까지 세었으며, X레이 필름 장수까지 기록했다. 아버지는 71년 말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갔다.

67년인가 종로에서 '석기시대'라는 음식점을 만들어 인기가 좋았던 김지하를 '얼굴마담'으로 세웠다. 다시 무교동에 '레지스탕스'라는 술집을 냈다. 72년 유신을 앞두고 우리 멤버들이 행적을 감춘 뒤에도 이 술집은 오랫동안 성황을 이루었다. 종로구청 직원이 찾아와 "술집 허가를 내주었다고 쫓겨났다"며 하소연했다. 그는 "이름이 '레스토랑'인줄 알고 허가해 주었는데" 라며 훌쩍거리던 생각이 난다.

71년 9월 15일 고려대학 사태로 위수령이 터졌다. 당시 신민당보 민주전선에 내가 기고한 글이 있었다. 종로에서 민주전선을 배포하다 뉴스를 들었다. 무조건 부산으로 갔다. 매일 방파제 옆 횟집에서 동료들과 소주를 마셨다. 주위에서 '이상한 젊은 놈들'이라는 소문이 나고 있었다. 서울로 되돌아왔다.

74년 초 후배인 조영래(82년 변호사 개업·90년 사망)와 함께 생업 차원에서 영어 참고서를 만들었다. '지학사의 영어문제집-송철원 조영래 공저'였다. 출판사에 함께 인세를 받으러 가려던 날 민청학련 사건이 발표됐다. 그 길로 조영래는 피신했다. 종로2가 제일학원에 영어강사로 취직했다. '문리대의 영웅'이라는 치기가 발동해 송문영이라는 가명을 썼다.

79년 남영동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김영삼씨 캠프에 있던 친구가 찾아와 YS 회견문이라며 영어번역을 부탁했다. 몇 건을 번역했는데 10·26이 터졌다. 건국대에 복귀하려고 하던 중 5·18이 일어났다. 93년 '신문로 포럼'이라는 6·3세대 토론광장을 만들었다. 'YS 회견문' 번역을 인연으로 94년 9월 민자당 성북갑 지구당위원장을 맡았다. 95년 8월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4개월 수감돼 있다 집행유예로 나왔다. 출마도 못한 채 YS계와 마음으로 결별했다. 99년 DJ 정부 때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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