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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 / 아버지와의 헌책방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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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 / 아버지와의 헌책방 추억

입력
2003.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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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우리 집은 부산의 '보수동 헌 책방 골목'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아버지의 손에 끌려 들렀던 그 곳은 한편으론 '꿈과 환상의 별천지'였고 다른 한편으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예술적 소양을 갖춘 분이었다. 아버지는 헌 책방 이 곳 저 곳을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잔뜩 쌓인 책 더미에서 좋아하시던 미술서적을 유심히 뒤적이기도 하고, 어린 내게는 재미없어 보이는 한자나 영어 투성이의 책을 골라주셨다. 가끔은 동화책이나 만화책을 안겨주시기도 했다. 어린 내게 이런 책들을 선물 받는 기쁨은 컸다."물건을 아끼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아버지는 만화책이나 동화책 뿐만 아니라 참고서나 교과서까지 그곳에서 사주었다. 난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낙서가 덜 되었거나 덜 찢어진 책을 찾았다. 헌 책이라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들키기 싫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면 표지에 적힌 책의 이전 주인 이름을 친구들이 보지 않을까 늘 가슴 졸였다. 그래서 필요할 때만 헌 책을 얼른 펴본 뒤 재빨리 가방에 넣곤 했다. 그때마다 속으로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그런 내가 이제는 대학생이 됐다.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어릴 적 보수동 헌 책방 골목의 풍경도 몰라볼 만큼 달라졌다. 헌 책방을 찾는 사람도 전에 비해 많지 않다. 하긴 새 책도 버리는 실정이니. 얼마 전 오랜만에 어릴 적 추억도 더듬을 겸 그곳을 찾았을 때 완전히 새 책방 골목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뭄에 콩 나듯 있는 헌 책방들도 대부분 새 책을 팔고 나머지 빈 공간에 헌책을 쌓아두고 있었다. 1,000원, 2,000원하는 헌 책이 더 이상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곳에 드물게 있던 헌 책방들도 사라졌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헌 책방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아쉬움과 함께 묘한 슬픔으로도 다가왔다.

세월은 참 빠르다. "우리 귀여운 승익이, 책방 가자. 그 곳은 지식의 보물 창고란다." 아버지의 따뜻한 목소리, 내 손을 잡던 솥뚜껑처럼 듬직한 당신의 손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당신은 여전히 건강하시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가족을 돌보느라 이마에 패인 주름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싸아'해진다. 그때는 퀴퀴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헌책 냄새가 너무 그립다.

/정승익·한국교원대 영어교육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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