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재(51)씨는 우리 만화계에서 드물게 리얼리즘을 추구해 온 작가이다. 만화는 20년은 그려야 자기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유행을 좇지도, 상업주의에 휩쓸리지도 않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왔다.그의 만화에는 현실의 고통과 냉엄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만화의 상상력을 빌려 가공의 세계로 도피하지 않고 언제나 현실과 마주한다. 하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늘 따뜻하다. 이번에 복간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청년사)도 그의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섯 살 꼬마 제제가 환상과 꿈의 세계에서 벗어나 고통으로 가득찬 현실을 깨달아 가는 J. M. 바스콘셀로스의 원작소설 그대로 성장의 아픔이 칸칸이 배어 있다.
1988년 어린이 만화잡지 보물섬에 연재된 것을 두 권의 단행본으로 냈다가 절판됐으나 출판사의 요청으로 서너 달 동안의 컴퓨터 채색 작업을 거쳐 한 권으로 묶었다. 그는 "제제가 아버지에게 많이 혼나고 매 맞는 것 등이 내가 어렸을 때와 비슷한 점이 많아 공감을 느꼈다"며 "그림을 그리면서 내용에 몰입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회고했다.
그의 만화에는 성장만화가 많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 이어 곧 복간될 '저 하늘에도 슬픔이', '아홉 살 인생(옛 제목: 나 어렸을 적에)'도 성장기 어린이 이야기이다. 지난 겨울부터 구상하고 있는 작품도 그렇다. 50여 년 전 일곱 살 짜리 여자아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어머니에게 밥을 지어드리기 위해 쌀 두 말을 지고 평북 선천에서 신의주까지 70㎞의 먼 길을 간 실화이다. 그는 "지난해 말 한 영화 감독에게서 그의 어머니의 어릴 때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 아이를 움직인 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을 동화책 같은 만화책으로 꾸밀 생각이다.
그는 리얼리즘을 고수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말을 하다 보면 가공하고 머리 속에서 '짜게' 된다. 그것은 때로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가볍고 작위(作爲)가 된다. 소박하더라도 실제로 겪은 얘기라면 무게가 다르다. 내가 겪은 것은 잘 그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겪지 않은 '구라'를 하려면 어딘지 켕기는 것 같고 가공을 해도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의 무대는 언제나 현실 사회를 벗어나지 않는다. 가상의 세계를 그리더라도 언제나 현실에 발을 붙인다. 그는 5,6년 전부터 일본 만화 '도라에몽'처럼 어린이들에게 교육적이면서도 상상력을 길러줄 만화를 구상하고 있다. "판타지인데도 과학적 합리성과 문학적 추론이 있다.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아이들 머리에 상상력의 문이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미 20여 개의 에피소드를 확보해 두었다. 마땅한 어린이 잡지가 있으면 연재하고 싶은데 10년 안에만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남경욱기자 kwnam@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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