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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과 사회]<1>"운명이려니…" 체념땐 정의는 설 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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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과 사회]<1>"운명이려니…" 체념땐 정의는 설 땅이 없다

입력
2003.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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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환 성균관대 교수가 매주 목요일 '운과 사회'를 연재합니다. 첨단과학기술 시대라는 오늘날에도 '운'(運)의 위세는 여전하고, 운세 산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개인적 차원에서 누구나 불운을 피하고, 행운을 잡고 싶어하며 자신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운'의 결과에 대해서는 흔히 체념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운'의 영향력은 대단히 커서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생각할 때는 이를 그냥 우연의 결과로 보고 지나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국내와 영국에서 진보적 자유주의 사회철학을 연구해 온 필자는 우리 사회에 다양하게 투영된 '운'의 뼈대를 드러내고 공정한 사회를 위해 어떻게 부당한 운의 영향력을 최소화할 것인지를 살펴 봅니다. "사회정의의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늘 운의 문제에 부닥쳤다"는 필자는 개인의 행복과 사회정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관점에서 '운'을 화두로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을 모색합니다. /편집자주

운명을 극복하는 사랑의 힘

얼마 전 '올인'이라는 드라마가 안방을 사로잡았다. 45%를 넘나든 시청률로 1990년대의 '모래시계'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이 드라마는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 오랜 기다림과 인고의 세월을 겪어야 한 청춘 남녀가 역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결합하는 사랑의 이야기다. 드라마의 대중적 인기는 우정과 야망, 배신과 폭력, 권선징악적 복수, 간헐적 웃음이 어우러진 데다 인기 정상의 두 탤런트가 열연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올인'이 극적 효과를 발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무자비한 운명의 힘과 이를 극복해 내는 청춘 남녀의 사랑을 대비, 인간의 나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부각했다는 점이다. 비극적 운명에 사랑의 힘으로 대항해 가는 두 젊은이의 삶을 통해 시청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만하다.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여러 감정을 자극했다. 운명의 횡포에 휘둘리는 청춘 남녀의 좌절과 방황은 하염없는 연민의 감정을, 돈과 애정 때문에 우정을 저버리는 나약한 인간상은 안타까움과 분노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냉혹한 운명의 시련을 견뎌낸 애절한 사랑은 가슴 뭉클한 환희를 느끼게 했다.

부당한 고통이 부르는 분노와 연민

이런 다양한 감정들 가운데 몇 가지는 '운'(運)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할 때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특히 분개와 연민의 감정이 그렇다. 사람들은 보통 부당한 일을 대하면 분개한다. 임진왜란 때 왜장을 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한 논개는 왜군의 부당한 침략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느꼈다. 독립만세 운동에 나선 유관순 열사 또한 일제의 부당한 식민통치에 대해 분개했다.

우리는 누구나 분노의 감정을 경험하곤 한다. 철없는 아동을 학대하는 어른들, 근로자를 착취하는 고용주, 그리고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적 관행 등을 대하면 저절로 분노를 느끼게 된다. 또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장애인이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극빈자, 난치병 환자 등에 대해 연민을 느끼며, 때로 그 연민은 곧바로 분노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분노의 감정은 그들의 고통이 터무니 없이 부당하고 지나치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신이나 남의 처지를 두고 뱉게 되는 "하늘도 야속하시지!" 하는 한탄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해 볼 수 없는 운명의 가혹함에 대한 진한 원망이 담겨 있다.

'올인'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느꼈을 감정 역시 이와 비슷하다. 운명의 힘이 두 주인공에게 준 고통과 쓰라림은 시청자들에게 연민과 분개를 함께 자아냈다. 시청자들의 분노는 두 주인공 사이를 시기한 야심 많은 친구에 대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는 운명의 횡포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불운에 대해 느끼는 부당성

이처럼 부당한 상황이나 불행한 처지에서 인간이 느끼게 되는 감정은 타인과 자연, 신의 섭리, 운명의 장난 등 대상이 다양하다. 또 부의 불평등을 낳은 사회 구조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체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극빈자의 고통에 대해서는 눈을 감으면서도 운 좋게 엄청난 재산을 물려 받아 호화로운 삶을 즐기는 부자들의 자유는 철저히 보호하려는 사회에 대해 공정성 측면에서 의분을 느낄 수 있다. 마음대로 믿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체제나 특정한 혈연 학연 지연에 권력과 명예를 몰아주는 현상도 유사한 감정을 촉발할 수 있다. 때로는 근면하고 성실한 삶의 태도와는 무관하게 늘 빈곤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기층민의 삶의 고통을 부른 '시장의 힘'에 대해서도 분노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생활에서 분노를 느끼게 될 만한 상황을 따져 보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운의 요소가 개입된 경우가 많다. 만약 운이 개입하지 않을 경우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일수록 불운을 당한 사람들의 분노는 커진다.

예컨대 어느 모로 보나 비슷한 실력을 가진 두 명의 입사 지원자가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마지막 관문인 면접 시험에 임했다고 하자. 한 사람은 호감이 가는 외모인 반면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고, 결국 외모가 나은 사람이 합격했다면 불합격한 사람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떨어진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외모 탓에 불행을 맞았다. 최종 경쟁자의 외모가 자기보다 못했다면 그는 합격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불합격은 그런 경쟁자 대신 잘 생긴 경쟁자를 만난 불운에서 비롯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업은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외모가 아닌 다른 이유를 들 것이다. 그러나 떨어진 사람이 언제고 진정한 낙방의 이유를 알게 됐다면 십중팔구 타고난 외모를 이유로 자신을 떨어뜨린 기업의 선택을 부당하다고 여기고 분노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업의 결정은 철회돼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그것이 안 되면 응분의 보상을 촉구하게 될 것이다.

보상을 요구하는 사회정의의 감정

이처럼 운의 개입으로 야기된 '부당한' 상황에 대해 사회와 국가가 어느 정도까지 개입하고, 시정할 수 있을까.

분개와 연민 같은 감정을 실마리로 삼아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은 이런 감정이야말로 인간의 다른 도덕적 능력을 자극하는 촉매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분노의 감정은 분개할 만한 부당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촉구한다. 동정과 연민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분개와 연민은 그런 감정을 부른 원인에 대한 사고와 판단의 결과이며 운이 빚은 부당한 상황, 즉 불의에 대해 적절한 시정과 보상을 요구하는 감정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은 마치 '올인'의 시청자들이 남녀 주인공을 갈라놓으려는 무자비한 운명의 힘에 분개해 그 보상으로 두 사람의 재회와 결합을 염원한 것과 흡사하다. 시청자들은 두 주인공에게 그들이 겪은 시련과 고통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품었다. 그런 요구가 빗발친 결과 '올인'은 결국 두 사람의 극적 재회에 이어 행복한 미래를 시사, 부당한 고통을 보상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사회생활에서 이런 부당함을 시정하려는 보상의 심리는 사회정의의 감정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운의 작용에 의한 '부당한' 사회적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것인지, 아니면 응분의 보상책을 통해 시정해야 하는지, 또 현실적으로 그런 보상은 가능한 것인지를 살피는 것은 사회정의의 실현을 꿈꾸고, 그 가능성을 가늠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과제가 돼 왔다.

/김비환·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 필자 약력

1958년 전남 여수 출생, 45세

성균관대 정외과

성균관대 정치학박사

영국 케임브리지대 정치학박사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저서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한길사), '데모크라토피아를 향하여'(교보), '맘몬의 지배'(성균관대 출판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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