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가 채 붙기도 전에 찾았을 만큼 이교숙 선생은 나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다. 당시 체계적인 음악 지식에 대해 내가 얼마나 목말라 했던 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먼저 그가 어떤 인물이었나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자.
무엇보다 이 선생에게는 클래식이니, 대중 음악이니 하는 도식적 구분이 없었다. 이는 그의 음악적 편력 덕택이었다. 그것은 이 선생이 군복무 중이던 1956년부터 2년 동안 미국 워싱턴의 음악 학교 USN에서 재즈 화성학을 공부하고 돌아 왔다는 사실이 잘 말해준다.
이 선생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미국서 섬세한 하프를 배운 연유도 그의 인간성을 보여준다. 당시 국내 오케스트라에 하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공간을 메우려는 의도였다. 그는 실제로 귀국 후 이화여대 등에 하프 강의를 개설, 국내 하프 연주사의 서막을 열었다. 90년 이 선생이 쓴 '하프를 위한 환상곡'은 국내에서 작곡된 대표적 하프 곡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트롬본과 하프라는, 일견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악기를 능통하게 다뤘을 만큼 폭 넓은 음악성의 소유자였다. 정규 클래식과 대중 음악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메우고도 남았다. 나와 만나기 3년 전인 59년, 그가 국방부의 위촉을 받아 썼던 '진혼곡'은 한국 정서에 잘 맞아 아직도 군에선 추모 의식이나 취침 소등용 음악으로 쓰이고 있다.
서양 음악에 필수적인 하프를 다룰 사람이 없어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하프를 배워, 국내 보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선생이 애국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이 선생과 만난 것은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당시 진해 군악학교 교장을 마치고 해군 본부에서 군악 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자신의 음악 지식을 다양하게 전수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알게 된 곳이 국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음악을 하고 있던 미 8군 무대였다. 군악대원들 중 상당수가 미군 무대에서 활동을 겸하고 있던 덕분에 미 8군 이야기가 자연스레 그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나에게도 나름의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미군 부대에 소속된 100여개 가까운 한국의 음악 단체가 모두 미국 음악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음악적 지식은 없이 괜히 겉 멋만 든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데 대한 불만도 한몫을 했다.
현실적으로는 미군이 선호하는 형식의 음악을 계속 개발해 쇼 무대를 더욱 번창케 하려는 연예인 대행사 '화양'측 사정이 더욱 다급했다고 봐야 한다.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던 차에 이 선생이 먼저 제의했으니 감지덕지가 따로 없었다. 전국에 산재한 미군의 입장으로도 자기네 입맛에 맞는 음악을 잘 만들어 내는 악사들을 뽑아 쓰려니 도울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교숙 음악 연구소 1기생이다. 모두 30명이었는데, 수업료는 강습생들이 거마비조로 모았다. 이 선생의 강의를 듣는 게 의무 조항은 아니었던지라, 몇 개월 지나자 수업 내용이 버거워진 상당수 학생들은 스스로 탈퇴하기도 했다. 원래 화양의 연습장에서 이뤄졌던 수업은 그래서 "계속 배우고 싶은 사람은 오라"는 이 선생의 말에 따라 퇴계로 자택으로 옮겨졌다.
사실 이 선생의 강의를 꼭 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 나는 미군 무대의 음악 연주만 열심히 해 주고 돈이나 잘 챙기면 그것으로 사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음악을 계속해 나갈 바에야 확실히 기초부터 하자는 나름의 다짐이 더 컸다. 강의 내용에 비춰 보면 말도 안 될 만큼 싼 강사료였지만, 8군에서 나오는 월급날과 아귀가 맞지 않을 경우는 빚을 내서라도 나는 그 강의에 참석했다.
고도로 이론적인 클래식의 기초 화성학에서 재즈 등 미국 특유의 음악 장르까지 아우르는 수업이 1960년대 초 한국에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돌이켜 보면 천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정통과 응용 음악을 두루 통달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모던 뮤직에 대한 인식의 틀이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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