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떨어졌는데 그리스도 피 좀 얻어먹읍시더. 우리 불교는 다 주는데…." 우남 스님 역의 박영규(49)가 영화 속에서 천주교 쪽을 향해 던지는 너스레다. 김 신부 역의 차인표(36)도 지지 않는다. "스님, 호방한 줄 알았는데 쪼잔하시네요" 시장 좌판에서 국수를 먹을 때도 상석을 따지는 우남 스님에게 김 신부 역의 차인표는 부드럽고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다. 각각 보리울 마을과 보리울 성당 축구팀을 이끌고 한 치의 양보 없는 대결을 펼치는 영화 속 두 종교인의 티격태격은 아름답고 유쾌하다."제가 아르바이트생 좀 썼습니다." '보리울의 여름' 영화 홈페이지가 벌인 설문 조사에 대한 이야기다. 누가 보리울 마을 대표 감독을 맡아야 할까? 65%의 지지를 받은 차인표가 겸손하게 '변명'한다. 이에 박영규는 팔짱을 끼고 '감독은 당연히 나 아니냐'는 듯 웃음을 짓는다. "난 센터포워드에서 양쪽 윙을 넘나드는 골잡이에요." 박영규는 자신의 타고난 골 감각을 자랑했지만 촬영 뒤 축구 대결은 언제나 김 신부의 성당 팀 승리로 끝났다. "박 선배님 팀에서 내부 분열이 일어나거든요. 문전에서 아이들이 패스를 안 하면 혼내세요." 박영규의 대답이 걸작이다. "내가 아이니까. 난 철이 아직도 덜 들었어."
스님 팀과 신부님 팀이 힘을 합해 읍내 축구부와 겨룬다는 영화 속 이야기처럼 이들은 설전을 멈추고 곧 서로를 추켜 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차인표씨 나이엔 꽤 오만했는데 차인표씨는 인기 정상의 배우인데도 참 겸손해요." "양파를 까면 매울 듯한데 까면 맛 있는 사과가 나와요. 박영규 선배는 그런 분이에요."
박영규는 드라마 속 '미달이 아빠'나 영화 '주유소 습격 사건'의 능청맞은 감초 조연을 넘어 묵직한 주연으로 영화를 이끌었다. "작가의 젊은 날 출가한 경험이 현실감 넘치는 캐릭터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진중한 삶 속에 웃음을 담아낸 그는 "아직도 나는 배고파요. 내가 알지 못하는 나를 찾아내 연기의 폭을 넓히고 싶다"며 이번 우남 스님 역을 맡게 된 운명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아이언 팜' 등 이전 영화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차인표는 "오케스트라의 화음처럼 욕심내지 않고 조화를 잘 이뤘다"고 흡족해 했다. "전에는 내가 착각을 했어요. TV에서 누리던 조건 그대로 영화에 뛰어 들었죠. 교만하고 무지했어요. 이번엔 편한 마음으로 찍었어요."
태풍이 불고, 아이들이 눈병에 걸리고, 논둑길에 경운기를 빠뜨리는 등 크고 작은 사고가 줄을 이었지만 '그해 여름은 행복했네'였다. 스님은 지난해 삭발한 머리가 다 자라났고, 신부님은 로만 칼라를 벗은 지 오래됐지만 두 사람은 아직 보리울 마을에 있었다. 차인표는 작년 여름 석 달 동안 함께 한 고생을 떠올리며 아무 탈 없이 촬영을 마친 50명의 어린이들이 고맙다고 했다. "10월 중순에 수중전을 찍는데 찬 비를 맞는 아이들이 가엾어서 모포를 덮어줬어요.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우리들이 아이들에게 커다란 추억을 선물했다는 생각에 뿌듯해요."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어 물었다. 성당에서 막걸리를 기울일 때 왜 수녀님에게 부침개를 부치라고 했느냐고, 함께 직접 부쳐 드셨으면 더 좋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차인표는 이렇게 받았다. "여학생인 동숙이가 축구팀 골잡이로 나오잖아요. 그걸로 상쇄되지 않았을까요."
/이종도기자 ecri@hk.co.kr
사진 이종철기자
스님과 신부가 시골 장터에 마주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곳, 고아들이 축구화 신고 마음껏 축구공을 내지르는 곳, 우리를 빠져나간 돼지라도 있으면 잡아서 동네 잔치를 벌이는 곳. 각박한 도시에 지친 사람이라면 귀가 솔깃할 마을이다.
'보리울의 여름'(감독 이민용)은 초여름 동네 어귀에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느티나무 같은 영화다. 자극적 재미보다는 잔잔한 웃음을 주는 소품이지만 희곡작가 이만희의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와 '개 같은 날의 오후'를 만든 이민용 감독의 안정적 연출로 이야기 그물코는 튼튼하다.
무대는 읍내 아이들이 '땅거지' 라고 놀릴 정도로 가난한 보리울 마을. 그곳엔 보리울 성당과 우남사가 지척을 두고 마주하고 있다. 별 다른 화제가 없는 조용한 마을이지만 골목대장 동숙이가 이끄는 축구 팀이 읍내 팀에 대패한 후 우남 스님을 축구 감독으로 모시고, 김 신부가 성당의 고아 소년을 모아 따로 축구 팀을 만들어 대결을 벌이면서 마을엔 활력과 긴장이 생긴다.
영화는 축구공 하나로 마을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한데 묶어준다. 축구공은 부모님이 있는지 없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종교가 무엇인지 등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축구 하나로 모든 갈등과 가난이 해소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성적 호기심에 눈 떠 가는 대목도 소홀히 하지 않는 건강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
보리울 사람들이 권한다. 쉬었다 가시라고, 한 숨 돌리시라고, 마을엔 웃음이 지천이라고. 25일 개봉. 전체관람가.
/이종도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