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스님더러/ '금강산에 가 참선을 해보겠습니다' 하니,/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웃으시며/ '금강산 구경이겠지? 다녀서 오게'하고, /그가 신던 편리화를 내게 물려주었다./ 잠시 잠깐만 외면하시더니/ '걸어서 가는 게 썩 좋겠구만'하고, /씨익 또 한 번을 웃으셨다."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의 시 '금강산으로 가는 길 1'의 첫째 연이다. 미당은 열아홉 나이에 구도의 열병을 앓았다. 대종사의 반열에서 선문을 이끌던 만공은 그 무렵 금강산 마하연 영원암에서 후학지도에 힘을 쏟고 있었다. 미당은 스승에게 결심을 말했다. 머리를 깎아준 스승이었다. 하지만 제자가 결코 잿빛 염의와는 인연이 닿지 않을 것임을 일찍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기꺼이 만공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건네 주었다."나보고 천수염불을 외워 보라더군./ 콩밥 먹여 재울 만한 진짜인가를/ 시험해 보자는 속셈이었지 뭐./ 거기 통과하고 나니 좁쌀밥 대접인데,/ 이런 밥이 특미인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지./ 우리 석전스님은 용하시여./ 이런 맛을 두루 미리 알아차리시고,/ 걸어가며 골고루 맛보게 하셨으니." 미당은 금강산 여정에 양주 망월사, 연천 심원사, 철원 도피안사, 금성 천불사를 거쳤다. 발길 머물 때 마다 편리화(운동화)까지 내주시던 스승의 참뜻을 깨닫고 뒷날 시에 적었다. 미당과 만공의 인연은 맺어지지 못했다. 미당은 "되돌아오니 스님은 '내 뭐라던가' 하면서 다시 당신의 곁에 주저 앉혔다"고 술회했다.
미당은 이승을 뜰 때까지 스승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1870∼1948)의 은혜를 잊지 못했다. 그 사랑을 도애(道愛)로 표현했다. 평생 가장 깊은 사랑이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선과 교에 두루 통달한 한영은 순창 구암사 설유처명(雪乳處明) 문하에서 지혜의 눈을 밝힌다. 한영은 평생 지계엄정(持戒嚴正)의 자세를 잃지 않은 청정 비구였다. 지계는 그의 삶을 관통한 화두였다. 계율은 집의 주춧돌과 같다. 수행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부처는 "계율을 지키는 것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몸에 두른 것과 마찬가지다"고 가르쳤다.
"그 일본과자 맛이 아주 고소하구나."
"그건 과자가 아니라 오징어를 다시마로 싼 것입니다."
"오징어라니, 그건 무엇인데."
"오징어는 생선과 같은 것입니다. 그걸 잡수셨으니 계를 범하신 셈. 거기에 대한 법문을 듣고 싶어 일부러 스님께 드린 겁니다." 한 학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방안은 웃음바다로 변했다. 한영은 짧은 미소를 거둬들인 다음 입을 열었다.
"나는 과자를 먹었으되 너희들은 나에게 오징어를 먹였으니 계를 범한 쪽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니라."
"잡수신 분은 스님인데두요."
"허허, 갓난아이 손에 지글지글 끓는 인두를 쥐어주었으면 과연 잘못은 누가 범했는고. 뜨거운 줄 모르고 덥석 잡은 갓난아이의 잘못이냐, 아니면 그걸 쥐어준 어른의 잘못이냐."
한영은 쉬운 비유로 지계의 참뜻을 일깨웠다. 지계는 사려깊음을 내포한다. 사려가 없는 사람은 이웃을 외면한다. 오직 자신의 이익과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어떤 사람이 많을까.
인재양성과 포교현대화, 한영의 회향(回向)은 이 두 가지로 귀결된다. "우리 불교는 고려시대부터 치유하기 어려운 병균이 유전·만연돼 왔다. 왕권과 밀착하는데 정신이 팔려 중생을 외면했으니 쇠락은 당연한 법. 병폐는 교육의 불완전에서 비롯됐다. 특히 청년불자의 양성은 삼보를 일으키는 초인(初因)이다." 불은(佛恩)을 사회에 환원하는 첫 걸음은 인재불사였다. 동대문 밖 개운사에 강원과 불교전문학교를 세운 이유다.
정인보 최남선 이광수 오세창 홍명희 안재홍 고희동 김복진 등 내로라 하는 지성들도 한영의 큰 그늘로 몰려들었다. 광복 후 한국불교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받은 청담과 운허도 마찬가지 였다. 미당은 물론 신석정의 문학세계 역시 한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포교이생(布敎利生). 한영은 포교를 통해 중생의 이익을 도모했다. 기복신앙의 늪에 빠진 불교의 행태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불교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새 사상과 학문을 수용, 포교에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영의 깨달음의 세계는 화엄의 원융적 사상과 맞닿아 있다. 화엄경은 경전의 꽃이다. 동서양의 온갖 사상을 아우르고 융합하는 고차원의 세계관을 머금고 있다. 동양의 지적 엘리트들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정신문명의 창조자로 이끈 등불이 화엄경이었다. 법정스님은 "화엄경은 이웃과의 관계가 어떻게 이뤄져야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지를 온갖 비유와 이야기로 서술하고 있다. 인간이 되려면 무한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즐거움과 고통을 이웃과 나눠야 한다. 그래야 있음과 서야 할 자리를 되찾게 된다"고 말한다.
한영이 그렇다고 선과 거리를 둔 것은 아니다. 한영은 참선의 요체를 3가지로 설명한다. 큰 믿음(대신근·大信根) 큰 분노(대분지·大憤志) 큰 의문(대의정·大疑情). 서산대사의 수행법을 계승하고 있다. 한영은 선교일치를 추구했다. 선은 부처의 마음, 교(경전)는 부처의 말이다.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한영은 말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참뜻은 경전의 버림이 아니라 문자에의 얽매임을 끊으라는 가르침이라고.
"늙음을 허무하다 하는 것은 죽음도 삶도 깊이 모르는 입에서 나오는 법. 한지에 먹물이 번지 듯이 햇살이 창에 스며들 듯이 죽음은 삶에 스며드는 것. 밝게 스며드는 죽음을 알게 되면 늙는 것도 더 이상 두려운 게 아니네. 죽음을 알고 나면 지혜롭게 사는 일만 오롯이 남아서 오히려 조용하고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나니." 고희를 맞은 한영이 최남선에게 들려준 법문이다.
多島亭亭暎日斜(다도정정영일사·많은 섬 곳곳에 석양 빛 쏟아지니)/姻雲錯落似奇花(인운착락시기화·저믄 구름 붉게 피어 한송이 꽃 같네)/ 波光岸影隨帆轉(파광안영수범전·바다 빛과 섬 그림자 뱃머리에 굴러가니)/ 身世蒼凉等落霞(신세창량등낙하·처량한 내 신세 낙조와 다름없네)
노을진 다도해의 풍광이 눈에 잡히는 한영의 선시 '다도해'다. 한영은 300여편이 넘는 시를 남겼다. 고희에 맞춰 '석전시초(石顚詩 )가 나왔다. 정인보는 행략(行略)을 썼다. "스님의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 것이 마치 거울에 그림자가 스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경지에 의해 시에 담겨진 사상이 범상치 않고 깊은 경지에 이르러 그 격조는 고인의 걸작과 맞먹고 문장 또한 선리(禪理)를 잘 표현해 걸리는 바가 없다." 최남선은 발문을 통해 "내 글이나 학문에 스님의 은혜가 스미지 아니한 곳이 없다. '이젠 늙었어…'라는 말씀에 불현듯 올해 고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스님에게 바칠 것이 없으나 마음만은 그냥 있을 수 없었다"고 존경의 마음을 밝혔다.
한영은 광복이 되자 모든 일에서 벗어나 내장사로 내려갔다. 거기서 삶을 정리할 작정이었다. 1948년 음력 2월29일 육신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졌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 연보
1870.8.18. 전북 완주출생, 속성은 전주 박씨, 속명은 한영, 법명은 정호
1888 위봉사에서 출가
1895 순창 구암사 설유처명의 법을 잇고 영호라는 법호와 함께 석전의 시호를 받음
1908 상경, 한용운 등과 불교유신운동
1926 개운사에 불교학교 설립
1929 조선불교교정 취임
1945 광복과 더불어 조선불교 제1대교정 추대
1948 내장사에서 세수 78, 법랍 60세로 입적
1988 영호대종사어록 발간
■백파의 혜안과 추사의 흠모 6대만에 주인찾은 시호 "石顚"
한영은 출가전 이름이다. 법호인 영호(映湖), 법명인 정호(鼎鎬)보다 속명이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한영의 시호 석전은 절집이 아니면 찾아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선객 백파(白坡·1767∼1852)와 동시대의 석학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깊은 우정에서 그 시호가 탄생한 것이다.
스물 다섯의 한영은 스승 설유의 부름을 받았다. "그대에게 법을 전하니 법호를 영호라 할 것이니라. 그대는 백파스님의 육대손이니 부끄러움이 없도록 용맹정진해야 하느니라." 스승은 간곡한 부탁과 더불어 소중하게 간직해 두었던 오동나무 상자를 열었다. 스승이 꺼낸 빛 바랜 종이에는 '石顚'의 두 글자가 씌어 있었다.
추사는 석전과 만암(曼庵)의 시호를 써 백파에게 보냈다. 마음에 들면 가져도 좋고 아니면 제자에게 주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백파는 스스로 가질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제자 중에서도 합당한 재목이 없었다. 백파는 후세에 시호에 걸맞는 그릇이 있으면 전하라고 이른 뒤 열반에 들었다. 그의 생전에는 시호가 주인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유언을 전해들은 추사는 흠모의 정을 감추지 못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백파의 혜안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 것이다. 부모의 비문조차 쓰지 않았던 추사는 백파의 비문을 손수 지었다. 그리고 "백파는 화엄종주이자 율사이며 대기대용(大機大用·대선사의 보살행)의 격외선사(格外禪師)"라고 추앙했다. 격외선사는 달마와 대등한 경지의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을 일컫는다.
시호 석전의 전(顚)자에는 '구르다' 는 뜻 외에도 '이마'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돌처럼 단단한 이마, 즉 명석한 두뇌와 불퇴전의 정신까지 상징한 시호라고 할 수 있다. 만암의 시호는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송만암(宋曼庵·1876∼1957)에게 전해졌다. 송만암은 한영을 사사한 선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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