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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최루탄도 없는데 눈물이 나"/"영원한 히피" 한 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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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최루탄도 없는데 눈물이 나"/"영원한 히피" 한 대 수

입력
2003.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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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 아비규환 좀 보시오. 이 할배 눈에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한국에 머물고 있는 한대수(55)는 연희동 거처의 거실 한 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폐허로 변해 버린 바그다드의 전장을 보여 주는 CNN 뉴스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통 해결할 수 없는 일로 마음 속이 갑갑하니 우에 노래가 안 나오겠노?"

이 시대의 마지막 히피, 기인, 외계인 혹은 한국 모던 포크의 비조(鼻祖) 등 수 많은 수식어가 따라 다니는 한대수. 그가 25, 26일 서울 대학로 동덕여대예술센터에서 콘서트를 연다. "인생을 거꾸로 사는 것 같아. 20·30대에 왕성하게 활동하고 늙으면 설렁탕집이나 해야 하는데…. 팔팔했던 때는 노래 안 하더니 쉰이 넘어서 부득부득 노래하겠다고 하니 말이야."

2000년 8집 '영원한 고독'의 작업을 마치고 나서 그는 "이 앨범이 마지막"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9집 '고민'(2002)이 나왔고 또 콘서트까지 연다. "사실 그때는 작곡이 안 돼서 그렇게 말한 거지. 쉰이 넘으니 뭘 봐도 아무 자극이 없었어. 어릴 때야 애인이 도망가거나 하면 술 먹고 가슴 쥐어 뜯으며 괴로워 하지. 마음의 캔버스가 검어진 거지." 다시 그를 자극한 것은 전쟁에 휩싸인 답답한 현재의 모습이다. "전세계적으로 반전 평화운동이 펼쳐지고 60년대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그 때는 하고 싶은 말 다 못했지만 이제는 할 수 있다니 한번 맘껏 해 봅시다."

독재의 서슬 퍼랬던 1968년 긴 생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등장해 '바람과 나' '행복의 나라로' '물좀 주소!' 등이 실린 앨범 '멀고 먼 길'(74)로 한국 모던 포크를 창시했고 곧 이어 철조망에 고무신이 걸린 재킷의 앨범 '고무신'(75)을 발표하고는 쫓기듯 미국으로 건너갔던 그다. 이 때문에 '장막을 걷어라'며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고 외치는 '행복의 나라',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마르오 물 좀 주소'라고 외치는 '물좀 주소!' 등 그의 노래는 저항가요로 분류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내 노래는 저항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지극히 정상적인 노래를 그 괴이한 사회가 이상하게 바라보게 만든 거지."

이번 콘서트의 타이틀은 눈물. "89년 앨범 '무한대'를 내고 한국에 들어 왔지. 동국대 근처 호텔에서 묵었는데 한 친구가 '감시 당하고 있으니 다시 미국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하더군. 끊임없이 나를 밀어내는 이 나라에 대한 원망 때문에 또 데모대에 쏘아 대는 최루탄 때문에 울면서 한국을 떠났던 때가 생각나. 요즘은 최루탄도 없는데 눈물이 나. 나야 다 살아 상관 없지만 젊은 사람들이 걱정이지." 따스함이 묻어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 "이 순수한 사람을 왜 '외계인' 취급하며 쫓아냈던가"하는 의문이 들 지경이다.

모던 포크의 창시자라는 명성과 달리 이번 공연은 2000년 잠실 펜싱경기장 콘서트 이후 갖는 두 번째 단독공연이자 첫 소극장 무대이기도 하다. "너무 떨려. 소극장에서는 관객의 얼굴이 다 보일 텐데, 관객들이 나를 어떻게 쳐다볼지…." 이번 공연에서 그는 '행복의 나라' '바람과 나' 등 귀에 익은 옛 노래와 함께 '마리화나' '호치민' 등 실험성 짙은 최근 곡을 함께 들려준다. 연주는 이우창 김도균 등 그를 따르는 쟁쟁한 뮤지션들이 맡는다. 공연문의 (02)3272―2334

/최지향기자 misty@hk.co.kr

● 한대수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한대수'가 최근 DVD(스타맥스)로 발매되는 등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다.

한대수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신학대 초대학장을 맡은 고(故) 한영교 박사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핵물리학자 한창석 박사다. 한대수가 일곱 살 때 미국 코넬대에서 핵물리학을 공부하던 아버지는 갑자기 실종됐고 17년 뒤 발견됐을 때 한국어를 모두 잊은 채 금발의 여인과 재혼한 인쇄소 사장이 돼 있었다. 수소폭탄 제조기술을 연구했던 아버지를 둘러싸고 CIA에 의해 제거됐다는 등 소문만 무성했다. 그 사이 재혼한 어머니는 그의 표현대로 '광신도'가 됐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뉴햄프셔대에서 수의학을 공부했다. 1974년 첫 부인 김명신씨와 결혼했으나 89년 이혼한 뒤 92년 스무 살 아래인 몽골계 러시아인 옥산나와 결혼해 뉴욕에서 살고 있다. 세 사람은 한 때 같이 살기까지 했을 정도로 절친하다.

2집 앨범 '고무신'이 정권에 의해 몰수되고 77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뉴욕에서 스튜디오 샐러리맨과 사진작가 등을 전전하며 3, 4, 5집을 낸 그는 97년 일본 음악 관계자에 의해 재발굴돼 후쿠오카(福岡)에서 록스타 카르멘 마키와 함께 대형 콘서트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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