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남편을 둔 주부입니다. 흔히 말하는 군인 가족이지요. 18년전, 저와 결혼할 당시 대위계급장을 달고 패기만만하던 남편은 이제 원숙함이 느껴지는 지휘관이 됐습니다. 남편의 한쪽 어깨에 중령 계급장을 제 손으로 직접 달아준 게 1995년 11월이니까 참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남편이 워낙 오래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다 보니 주위에선 대놓고 묻습니다. "네 남편은 언제 진급하니?" 이런 질문을 받으면 "혹시 네 남편이 무능해서 만년 중령하는 것 아냐"라고 말하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남편이 참 똑똑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평생 대학강단에 서신 친정 아버지 안목에도 남편은 빠지지 않는 청년이었나 봅니다. 어렵지 않게 결혼허락을 받아냈으니까요. 물론 군인에게 시집가면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다며 만류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그래도 우린 결혼했습니다.
결혼하고 보니 그 분들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습니다. 거의 매년 이사해 지금은 16번째 이사한 집에서 살고있습니다. 신혼생활을 시작한 곳은 강원도 철원하고도 끄트머리에 있는 전방부대였습니다. 전기는 들어왔지만 걸핏하면 정전이 되었습니다. 수돗물은 아예 나오지도 않아 개울에서 빨래는 물론 쌀도 씻어야 했답니다. 신혼 살림으로 장만한 세탁기는 무용지물이 됐지요. 남편이 훈련 나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면 한 여름에도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대남 방송을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습니다. 그러다가 연탄 가스 중독으로 어린 딸과 제가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정말 속이 상했고 남편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이 음식을 만들어 부대 장병들을 위문하는 행사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포장도 안된 험한 길을 한참 달려 도착한 곳에 펼쳐진 광경이란…. 말끔한 제복을 입고 장엄하게 도열해있는 장병들 앞에 선 지휘관! 그 멋진 남자가 바로 저의 남편이었습니다. 그 가슴 뭉클한 장면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하지만 그 감동도 잠깐. 부대를 둘러보며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남편과 장병을 보며 애처로워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습니다. 남편에 대한 그간의 원망이 감동과 이해로 바뀌었습니다.
선배 사모님의 충고가 떠오릅니다. "남편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남편 덕분에 그 동안 모르고 지냈던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하긴 남편이 원해 택한 길이고, 저도 그런 남편을 선택해 살고 있습니다. 큰 아이는 초등학교를 3 번, 중학교를 2 번이나 옮겨 다녔는데 지금은 고등학교까지 전학가야 합니다. 다행히 성격이 좋아 그렇게 전학을 다녀도 잘 적응합니다. 저는 욕심을 더해 공부까지 잘하라고 채근합니다만.
요즘 같은 시대에 어느 주부가 18년 동안 이사를 16번이나 하고 자기 자녀들을 1, 2년마다 전학하게 만드는 남편을 이해할까요. 시골의 15평 짜리 아파트가 우리 다섯 식구의 보금자리입니다. 저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은 군인이 아니라 군인 가족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영·충남 논산시 두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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