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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교장자살" 보성초등교 주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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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교장자살" 보성초등교 주변마을

입력
2003.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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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부터 수암산이 감쌌다. 손가락으로도 꼽힐 듯 집들은 논밭을 끼고 띄엄띄엄했다. 신작로가엔 철쭉꽃과 개나리가 흐드러졌다. 더덕 갈고, 사과나무 키워 자식들을 가르쳤을 촌로가 봄볕을 받으며 밭머리에 웅그리고 앉았다. "뭐든 심으면 잘 자라고 물난리도 한번 겪지않은 복 받은 땅이유"라고 했다. 조붓한 신작로를 20분 차로 달려 다다른 고즈넉한 마을. 충남 예산군 삽교읍 목리. 보성초등학교가 자리한 마을이다. 회양목 담장에 야트막한 건물로 학교는 마을을 굽어보고 섰다. 마을 풍경에 들이맞춘 듯 하다. '자질 없는 교사…떠나라.' 교문에 내걸린 플래카드만이 생경하다.이곳에 초임 교장으로 와 3년을 근무한 서승목 교장은 3월 부임한 기간제 여교사와 '차접대'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여교사는 사직한 뒤 인터넷에 폭로성 글을 띄웠다. 전교조측은 서 교장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여교사는 복직했지만 서면 사과 요구는 계속됐고 교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교장단, 교총 등은 전교조의 협박이 교장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주장했고, 양측 갈등은 일파만파가 됐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고 학부모들은 "교장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기간제 여교사와 동조한 전교조 소속 여교사 등 3명은 학교를 떠나라"며 학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있다. 볕 좋은 초 봄, 시골학교에서 최근 한달 새 벌어진 일이다.

학교가 딛고선 곳은 목리지만 학교를 경계로 이리와 신리, 수촌리가 맞닿아 있다. 이 학교 재학생 61명은 네 마을에서 모여든 아이들이다. 마을 촌로는 "동네 사람들이 쌀 걷어 세운 학교"라고 했다. 1971년 학교 터를 갈기위해 지게지고 삽질했다는 촌로는 "학교는 동네 사람들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학교 운동회 날은 청·백 대항전이 아니라 마을 대항전이 벌어진다고 했다. 교장, 교감에 교사, 직원 모두 10명. 가족 같은 학교였다고도 했다.

10일 오전 학부모 20여명은 마을을 떠나 예산군 교육청에 가있었다. 평생 처음 해 본다는 시위. 손 올리고 구호 외치는 모습이 어색하다. 점심시간 교육청 마당 잔디밭에 도시락을 편 학부모 시위대 모습은 차라리 동네 야유회 풍경이었다.

"씨나락 다 썩어버릴 지경이유. 요즘이 얼마나 바쁜 철인데." 볕에 그을린 농부의 얼굴은 초등학생 아버지치고는 늙수그레하다. 학부모 대책위원장이 털고 일어선다. "마지막으로 구호한번 외치고 가겠시유. 교사들은 보성을 떠나라." "떠나라." "떠나라."

학부모들은 이날 독하게 마음 먹은 모양이었다. 학교로 돌아온 학부모들은 여교사들의 교실로 향했다. 교육청 앞 집회서 내건 '공갈 협박 교사 물러가라' 플래카드 따위를 교실 벽에 내걸 것이라고 했다.

세 명의 교사들 중 4학년 담임 최모 교사만 학교에 나와 있었다. 학교에 들어설 때만 해도 서슬 퍼렇던 학부모들은 쭈뼛쭈뼛했다. 교실 앞에 학부모 몇 명만 서서 "학교를 떠나줄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읽었다. 학부모들은 여교사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여교사도 고개를 숙였다. 학부모들이 슬금슬금 물러난 뒤 젊은 여교사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도회지는 어떤지 몰라도 여기는 아직도 선생님하면 깜빡 죽어유. 그림자도 못 밟는다고 아직 그래유. 그런데 선생님을 앞에 두고 떠나라, 물러가라고 해 버렸시우. 오죽하면 그랬겠시유." 대책위원장의 말이다.

학생들이 재잘재잘했을 오후의 학교는 여기저기서 온 객들로 붐볐다. 한 국회의원이 진상조사차 다녀갔고 여성단체에서도 왔다 갔다. 교육청 공무원이 상주했고 언론사 차량들이 좁은 학교 안을 채웠다. 학교 담장에 걸린 '효도는 사람의 근본' 플래카드도 서 교장이 내다 건 것이라고 했다.

효를 강조하던 교장은 선친의 49재를 앞두고 노모에게 참척(慘慽)의 불효를 안겼다. 교장은 4일 예산군 신양면 본가를 찾아 노모에게 아침 문안한 뒤 근처 야산에서 목을 맸다.

"그 올곧던 교장 선생님이 불효를 결심했을 때는 오죽 했것슈." 한 직원이 서 교장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서 교장은 자살 전날 퇴근 시간을 훨씬 넘기고도 학교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운동장이며 건물을 둘러보는 교장에게 "퇴근 안하세요"라고 하자 말없이 손만 내밀었다고 했다.

11일. 기간제 여교사는 사건 이후 병가를 내고 학교를 나오지 않고 있었고 전날 나왔던 최 교사는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1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정모 교사만 빈교실을 지키며 혼자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자신을 물러가라고 쓴 피켓을 쳐다보다 볼 가득 숨을 모았다가 뿜어냈다. 충혈된 눈가는 부어 있었다.

아이들이 휴대폰으로 전해오는 격려가 유일한 힘이라고 했다. 자신을 거쳐간 아이들이 "선생님을 믿는다"며 울음 섞어 전화하면 교사 생활을 잘못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1년간 이 학교에 재직했던 두 여교사는 담임을 맡았던 학생들과 학부모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두 여교사는 지난달 말 기간제 여교사가 사직·복직하는 과정에서 교장과 교감의 대응이 잘못됐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지난달 31일 서 교장을 성토하는 전교조 집회에 참석했다. 학부모들은 이 점을 들어 두 여교사의 책임을 묻고 있다. 정 교사는 "교장선생님이 자상한 분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그 문제 만큼은 처리가 잘못됐다고 지적했을 뿐"이라고 했다. "집회에서도 경과만을 얘기했을 뿐 오히려 교장을 두둔했다"고 했다. 어쨌든 그들은 '공갈 협박 교사'가 돼 있다. '마녀'가 돼있다.

12일 토요일 오전. 20여명 학부모들이 다시 학교에 모였다. 학생들을 이대로 놀릴 수는 없다며 월요일부터 교회 등에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자고 했다. 몇주째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고 집에서 컴퓨터 게임에만 매달려있다며 걱정을 쏟아냈다. 교장의 죽음에 이어진 학부모와 교사의 대립으로 아이들이 입을 상처를 염려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피해본다는 생각은 같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은 스펙트럼처럼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딴 거 없시유. 교사들이 교장선생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만 보여줬어도 우리가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시유. 교사들이야 하고 싶겠지만 전교조서 못하게 막는 것 같아유." (학부모 A)

"이제는 얘들도 사정을 알고서 교사들한테 돌아섰다니까요. 정 떨어졌대유."(학부모 B)

"교장단이네 교총이네 하며 우리 이용해먹으려는 것도 알아유. 우리는 그 쪽 입장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교장선생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유. 기자들이 와서 '전교조 싫지유'란 말을 유도하려고 이리저리 묻는데 우리는 전교조고 그런 거 몰라유."(학부모 C)

"교사들도 억울한 부분이 있겠지유. 하지만 이 지경까지 됐는데 어떻게 그 교사들에게 다시 아이들을 맡겨요. 교사들이 떠나줘야지." 비교적 솔직했다. 또 다른 학부모는 "학부모들끼리도 왕따 당할까봐 속내를 못 드러낸다"고도 했다.

마을 사람, 학부모라고 해서 모두 집단 행동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40대 학부모는 "교사들간 문젠데 학부모들이 왜 끼어. 애들만 피해를 보는 거지. 교장도 그렇지 죽긴 왜 죽어. 무책임하게시리"라고 했다. 신리에서 만난 30대는 "시골 마을에서 이 무슨 변고냐"고 말을 꺼내자 "시골학교일수록 문제가 많아요. 교직원 몇 명 안되니까 뭐든 교장 교감 뜻대로 였잖아요. 그러다 이런 문제가 불거진거죠"라고 했다.

"어른들은 '싸우지 말고, 싸우더라도 바로 화해 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왜 그러죠." 이 학교 4학년 한 학생이 최근 일기에 그렇게 썼단다. 사태의 진실은 밝혀지기 힘들고 첨예한 '투쟁'과 '희생양 제의'는 당분간 계속될 터이다. 모두 피해자였고 가해자였다.

/예산=이동훈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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