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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록의 대부 신중현 <42> 뽕락의 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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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록의 대부 신중현 <42> 뽕락의 발호

입력
2003.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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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서울이면서도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8군 안팎에서 벌어졌던 괴리는 얼마나 컸던가. 시작은 역시 5·16 군사 쿠데타 이후의 군사정권 수립이었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장면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좌에 오르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서울 사람이었다. 특히 내가 알던 많은 사람들이 답답한 서울을 떠나 줄줄이 이민을 가 버리는 바람에 주위에 아는 사람이라곤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기사 75년 방송금지 조치를 당하고 났을때는 아예 아무도 없었지만.박정희 정권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서울의 주도 세력은 경상도 출신으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가요판도 지각 변동을 겪게 됐다. 70년대 들어 주한 미군 감축으로 미군을 대상으로 한 무대들이 줄줄이 문들 닫았고, 그 뒤를이은 것이 부산을 기점으로 밀려 온 일본 문화였다. 그 중심에는 트로트가있었다. 미군 무대가 사라지고 얼마 안돼 유행하기 시작했던 게 바로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엔카 가수 모리시니치의 노래를 불러 유명해진 조용필이 록과 뽕짝을 적당하게 얼버무려 내놓은 이른바 '뽕락'이 득세하기시작하던 때였다. '오동잎'(최헌)과 같은 뽕락이 대중음악을 지배했고, 서울의 문화풍경은 일거에 뒤바뀌었다.

뽕짝 바람은 김추자나 펄 시스터즈 등 내사단의 스타들만을 거둬 산 것이아니었다. 서유석, 김정호, 윤형주 등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던 포크 계열의 가수들까지 사라져싿. 포크와의 인연은 내가 60년대 OB's 캐빈의 가수들과 가졌던 일련의 작업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유신이 절정기에 올랐던 70년대 후반, 한국의 대중음악은 급속도로 퇴보의 길을 걷게 된것이다. 그떄는 저질 음악의 세상으로 품위란 찾아 볼 수 없었다. 매우 역겨웠고, 도무지 살맛이 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뽕락 스타들이란 신중현 사단이한창 활동하던 때에는 거짓말 하나 보태고 우리 옆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던자드링었다. 물론 그 음악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엄청나 ㄴ권력의폭력에 의해 시대 흐름이 돌변했던 과거를 돌이키도 있을 뿐이다. 그 같은단절감이 극데 달했던 때가 '나의 이력서' 서두에서 밝혔단 대마초 사건이었다 1976년 출소 직후였다.

남영동을 지나고 있는데, 배가 고파 앞에 있는 중국지벵 들어갔다. 홀에서자장면을 먹고 있는데 방안에는 회식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몇 순배 돌아 갔는지, 합창 소리가 호기롭게 터져나왔다. 트로트였다. 혈기 넘치는젊은 사람들이 트로트를 부르는 광경을 대하니 내 의식은 까마득히 잊고있었던 과거로 사정없이 치달았다.

50년대 먼 친척이 하던 해소병 제약회사 상수제약에서 일할 떄의 풍경이앞을 콱 막았다. 그 힘들었던 시절, 라디오 또는 술꾼들로부터 시도떄도없이 들었던 트로트 선율이 리바이벌돼 오는 것 아닌가. '신라의 달밤','방랑 시인 김삿갓', '비나리는 호남선'등등. 아, 이제는 갓 고등학교를마친 학생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는구나!' 다리에서 힘이 일시에 빠져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금지의 족쇄가 채워진 상태라,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쌓아 올린 음악세계는 사라졌다는 절망감이엄습했다.

그 연유를 따져봤다. 내가 관여했던 노래드리 이런 저런 이유로 모두 금지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방송국이 문제였다. 틀만한 노래는 송두리째 족소ㅔ신세라, 방송국이 찾아 낸 해법이 바로 뽕짝이었다. 자료실 서가에서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옛 노래판이 전파를 탔고 아무 연유도 모르던 잚은 친구들에겐 그게 곧 당대 유행가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던 것. 나는 그시절, 우리 음악사가 졸지에 50년대로 후퇴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됐을까? 확신컨대 박정희가 일본 군인 출신이어서 트로트를 늘 듣고 부를 수 밖에 없었던 데에다, 방송 매체들이 그의취향에 부화뇌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그네길을 떠난 것은 필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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