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인턴일 때 일이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30대 남자 환자가 외래로 찾아왔다. 흉부엑스레이 사진으로 보니 늑막에 물이 차 있었다. 늑막에 물이 차는 증상은 결핵이나 세균에 의한 염증일 수도 있고, 심장병이나 간경화, 혹은 암일 수도 있다.이런 경우 물을 뽑아주면 일단 숨찬 증상을 해결할 수 있지만, 의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물을 가지고 여러가지 검사를 통해 정확한 병명을 알아내는 일이다.
당시 나는 풋나기 의사였지만, 늑막에 물이 찬 환자에서 물을 뽑아본 경험이 한번 있어서 자신만만했다. 먼저 책에서 늑막천자에 대해 내용을 읽은 뒤, 레지던트의 허락을 받고 환자를 처치실로 안내했다. 보호자가 따라와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번 경험을 살려 등을 소독하고, 마취를 한 뒤 긴 바늘로 찔렀다. 물이 좔좔 빠지는 것을 일단 확인한 다음, 환자가 어지럽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하면서 물을 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이 50cc 정도 나오다가 멈추고 말았다. 사진으로 보면 1,000cc는 고여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흉부엑스레이 사진을 다시 살피고, 환자의 등을 청진도 하면서 부산을 떨었다. 처음엔 능숙한 척 하려고 책을 들고 오지 않았다가, 처치실로 책을 가져와 다시 읽었다. 별 문제 없어보였다.
하는 수 없이 다른 부위를 조심스럽게 다시 찔러보았다. 이번에도 물이 조금 나오다가 만다. 자신만만하게 덤볐는데 예상대로 안되니 초조해질 수 밖에 없었다. 환자는 워낙 긴장된 순간이라 말을 못하고 있었지만, 뒤에 서있는 보호자의 숨소리는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불안해 하면서 잠시 기다리시라고 하고, 레지던트를 찾아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레지던트는 역시 달랐다. 안정된 표정과 태도로 보호자를 압도한 뒤 동요하지 않는 자세로 마취를 다시 하고, 서서히 바늘로 찔렀다. 나는 선배의 믿음직한 태도에 마음을 놓으며 이번에는 잘되겠지 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물이 또 20cc도 채 안 나온 상태로 멈추고 말았다. 레지던트도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엑스선 사진을 보면서 ‘왜 이러지.....’ 하는데 뒤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들, 이거 사람 가지고 생체실험해? 환자가 실험동물이야?”
보호자가 지금까지 참고 참았던 화를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움찔하며 얼어 붙었다. 그러나 레지던트는 산전수전 다 겪은 터라 달랐다. 보호자에게 같이 화를 내면서, 우리도 하느라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보호자가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옆에서 화를 내면 우리가 어떻게 환자를 보느냐, 우리도 왜 안 되는지 원인을 찾아야 하니 내일 다시 검사를 할 테니까 환자분 모시고 돌아가라고 큰 소리를 쳤다. 보호자도 설마 화가 풀렸으리 만무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데리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초음파를 해보니, 늑막에 막이 형성되어 있는 환자라 한꺼번에 물이 쏟아져 나오지 않는 특이한 경우였다. 하는 수 없이 초음파로 물이 나올만한 곳을 찾아서 몇 군데 물을 뽑아서 검사한 결과 며칠 후 결핵성늑막염으로 진단이 되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환자가 실험동물이냐’던 큰 목소리는 17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 의사는 늘 신중해야 한다는 경고로 메아리치고 있다.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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