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진 편집위원이 취재·집필하는 장기 기획시리즈 '민주화 발자취-6·3 사태에서 6월 항쟁까지'를 매주 금요일 연재합니다. 1950·60 년대 이래, 완고한 독재와 억압의 질곡을 타파하고 이 땅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염원에서 점화한 민주화 투쟁은 오늘 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뿌리이자 토양입니다. 그 장렬한 투쟁의 역사, 의로운 투사들의 발자취를 생생한 회고와 증언을 통해 되돌아보는 것은 보수와 진보, 반미와 친미 등의 새로운 이념과 정서를 경계로 갈등하며 표류하는 우리 사회에 각성과 교훈을 줄 것입니다. /편집자 주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네 주검의 악취는 '사꾸라'의 향기가 되어…. 절망과 기아로부터 해방자로 자처하는 소위 혁명정부가 절망과 기아 속으로 민족을 함멸시키기에 이르도록 한 너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었느냐?"
1964년 5월 20일 오후 1시. 서울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는 '축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란 만장이 펄럭였다. 3,000여 명의 대학생과 1,000여 명의 시민이 자리를 메웠다. 두건을 쓰고 죽장을 든 4명의 학생이 시커먼 관을 메고 입장했다. "(61년) 5월 군부 쿠데타는 (60년) 4월의 민족 민주 이념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탄압의 시작이었다. 민족적 긍지를 배반하고 일본 예속화를 추진하는 굴욕적 한일회담의 즉시 중단을 엄숙히 요구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이 발표됐다. 오후 2시. 김지하(金芝河·62·당시 서울대 미학과 4년)씨가 작성한 조사 '시체여'가 대회장에 울려 퍼졌다.
대일굴욕외교반대 대학생투쟁위원장으로 장례식을 주도했던 김중태(金重泰·63·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4년)씨의 설명. "당시 시위의 목표는 한일회담 반대였다. 서울 시내 9개 대학의 대학총연합회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 반대했다. 일부 학생회장은 장례식 전날 각 언론사를 방문해 '반대와 불참이 공식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당시 어느 학자가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수상의 '교도적 민주주의(Guided Democracy)'를 모방해 혁명정부에 진상한 구호로 박정희 대통령이 지극히 사랑하는 표현이었다. 이에 대한 장례식을 갖는다는 것은 곧 박 대통령에 대한 부고를 띄우자는 의도였다. 물론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은 결코 아니었다."
당초 장례식은 군사쿠데타 3주년에 맞춰 5월 16일에 열릴 계획이었다. 정보가 새 나가 20일로 연기됐다. 공개적인 대학총연합회는 뒷전으로 빠졌다. 김씨와 현승일(玄勝一·61·한나라당 의원) 김도현(金道鉉·61·전 문화체육부 차관)씨 등 이른바 서울대 정치학과 3인방이 주도하는 막후의 투쟁위원회가 장례식을 집전했다. 시청 앞에서 검은 관을 태운 뒤 해산하려던 장례행렬은 이화동 삼거리와 종로 5가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어둠이 깔리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학생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부음을 듣게 된 박 대통령은 물론 함께 시체가 되어버린 혁명주체세력은 몹시 화가 났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죽이겠다는 것은 제3공화국에 대한 '체제 전복 기도'로 밖에 볼 수 없었다. 이튿날 새벽 무장한 육군공수단 소속 군인 13명이 법원에 난입했다. 군용 앰뷸런스를 타고 온 그들은 영장담당 판사 자택으로 몰려가 데모 관련자의 영장발부를 강요했다. 당시 영장담당 판사였던 양헌(梁憲·74·동서울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씨의 회고. "돈암동에 살 때 였다. 새벽 5시쯤 거칠게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유 대위와 김 대위라고 소개한 무장군인 2명이 밀고 들어왔다. 밖에는 칼빈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있었다. 데모하는 놈들을 잡아 놓았으니 즉각 구속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류탄을 터뜨려 여기서 죽어버리겠다고도 했다. 어이가 없었다. 가만히 보니 군복차림이지만 신사화와 민간인 양말을 신고 있었다. 1시간 가량 실랑이 하다 돌아갔다. 출근해서 영장을 보니 경찰이 만든 조서에 검찰이 죄목만 급히 적어 놓았더라. 대부분 구경하다 돌을 던졌다는 학생들이었다. 조서 내용은 '돌 던졌나요' '아닙니다' '왜 던졌나요' '안 던졌다니까요' 식이었다. 모든 영장을 기각했다." 당시 투쟁위원회는 '막후 지휘부는 뒷일을 위해 일찌감치 피하고 장례식 이후 가두시위는 현장 책임자의 몫으로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튿날 육군참모총장은 '군인들의 우국충정이었다. 앞으로도 데모가 계속된다면 이 같은 군인들의 집단행동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 장병들의 경거망동을 막으려면 데모가 없어져야 한다'고 발표했다.
한일협정 체결을 위해 도쿄에 머무르던 김종필 공화당의장은 3월 23일 오히라(大平) 일본 외무장관과 회담을 갖고 "한일협정은 5월에 체결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65년 6월 22일 조인). 이튿날 전국에서 학생과 시민 8만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4·19 이후 최대 규모였다. '미국은 한일회담에 간섭치 말라' '나라 팔아먹는 한일회담 즉각 중단하라' '(일본에 있는) 제2의 이완용을 소환하라'고 외쳤다. 대구시경과 전남도경은 이날 정오 황색경보까지 발령했다. 당시 황색경보는 북한의 공습이 예상될 때 내려지는 것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김지하의 조사는 이어졌다. "종잡을 길 없는 막연한 정치이념, 끝없는 혼란과 무질서와 굴욕적인 사대근성, 방향감각과 주체의식과 지도력의 상실, 이것이 곧 너의 전부다. 시체여! 우리 삼천만이 모두 너의 주검 위에 지금 수의를 덮어주고 있다. …새하얀 수의를 감고 훌훌히 떠나라, 시체여!"
정병진 편집위원
● 김중태 당시 투쟁위원장
반공법 위반(67년 동베를린 교포간첩단 사건 연루 혐의)으로 2년형을 선고 받았다. 69년 9월 초 대전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혼자 새벽에 나왔다. 검은 짚차가 마중했다. 중앙정보부 대전분실로 갔다. 설렁탕 한 그릇 얻어먹고 서울로 달렸다. 남산이었다. 반공법 사범은 출소 후에도 정보부의 교육과 감시를 받도록 돼 있어 그런 줄만 알았다.
남산에 갔더니 여권을 만들어 놓았더라. 항공권 한 장과 함께. 미국 가서 공부나 해라. 또다시 붙들리면 꼼짝없이 사형이라고 했다. 군 영장도 나와 있다고 했다. 그해 말 비행기를 탔다. 워싱턴D.C. 덜레스 공항에 몇이 나와 있었다. 대학 졸업을 못한 상태였기에 미국 내 5∼6개 대학을 전전했다. 철학에 심취하게 됐다. 잡일도 하고 리커스토어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시작한 김에 철학박사나 되자 싶어 학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79년 10·26 직후 하와이 주립대에 연구원으로 와 있던 6·3동지로부터 박정희 사망 소식을 들었다. 공부는 무슨 공부, 서울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2년짜리 여권은 이미 무용지물이었다. 뉴욕 영사관에 여권발급을 신청했으나 거절 당했다. 관계자는 12·12 직후여서 무정부 상태다. 요주의 인물에 대한 여권 관련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다고 했다. 당분간 돌아 다니지 말라고도 했다. 사정도 하고 협박도 해서 '간이 여행증' 같은 것을 받아 귀국했다. 꼭 10년 만이었다.
80년 1월 10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동료와 후배, 기자 등 100여 명이 나왔더라. 별다른 제지는 없었다. 일부 신문은 내가 공항에서 "박정희 무덤에 침을 뱉으러 왔다"고 일갈했다고 크게 썼다. 그런 말 하지 않았다. 나의 귀국이 정치적으로 희화화 한 기분이었다.
몇몇 동지들과 무교동 인근에 사무실을 얻어 '자유정의 클럽'을 만들었다. 당시 YS(김영삼)계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래서 제2차 정치정화법에 걸렸다. 80년 5월 말이었다. 보안사에서 전화가 왔다. 전두환씨 휘하 '경복궁 회의' 핵심멤버인 고교(경북고) 동창 S대령이었다. 광주에서 5·18 당시 죽었다고 신문에 났던데 사실이 아니구먼 이라고 말했다. 북괴의 유언비어였다고 대답해 주었다.
며칠 후 S대령이 부하들을 대동하고 '자유정의 클럽' 사무실로 왔다. 그는 곧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다. 사무실 문을 닫아라고 했다. 친구로서 충고한다. 곧 정당을 만든다. 여야 모두 만든다. 우리에게 협조하면 여든 야든 원하는 대로 국회의원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싫다고 했더니, 다른 동지들은 더러 도와주는데 하며 섭섭해 했다. 아닌게아니라 며칠 후엔 그 동지들이 여러 번 전화를 해왔다. 이후 지금까지 서로 연락을 끊고 지낸다.
나는 우익 보수, 중도 민족주의 노선이다. 지금의 판을 봐라. 우리가 할 일이 있는가. 많은 동지들이 정치화했다. 나도 정치화하려 했으나 13대 총선(88년)에서 고배를 마시고 그만 두었다. 고생하는 사람 따로 있고, 챙기는 사람 따로 있다. 현실이 그렇고, 역사가 그렇다. 프랑스 혁명 때나 러시아 혁명 때도 마찬가지였다. 뉴욕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의 말 기억하나. 프랑스의 드골, 유고의 티토, 중국의 모택동이 사라지면서 개인의 시대는 갔다. 이제는 'take-care'의 시대라고 했다.
그는 88년 이후 칩거하며 철학과 사상 연구에 빠져 있다. 신라 고승 원효가 임종 때 남겼다는 예언서를 연구, 번역해 97년에 '원효결서'라는 책을 냈다. 원효의 예언서는 동해 대왕암(신라 문무왕 수중릉)에서 발견됐다. 현재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은둔하다시피 지내면서 '사상 관련 서적'을 집필하고 있다. 지난해 말 전남의 한 암자에서 원고를 쓰던 중 화재를 당해 한쪽 다리를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 머지않아 동서양의 모든 사상과 종교, 철학을 아우른 '김중태 사상론'이 출판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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