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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71>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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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71>라살

입력
2003.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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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4월11일 독일의 노동운동가 페르디난트 라살이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1864년 몰(沒). 19세기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다수가 그랬듯, 라살도 유대인 부르주아 가정 출신이었다. 부유한 견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브레슬라우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에서 역사와 철학을 배운 그는 재학 중에 이미 헤겔 좌파(청년 헤겔학파)의 논객으로 이름을 얻었다.라살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신(新)라인 신문'에 협력하며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38세 때인 1863년 전독일노동자동맹을 조직해 독일 노동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마르크스와의 불화가 시작된 뒤였다. 바로 그 해에 출판돼 저자를 법정에 세우고 유죄 판결을 받게 한 라살의 '노동자 강령'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나쁜 방식으로 통속화했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라살이 죽은 뒤 그의 유산은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해 19세기 말 이래 독일의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을 형성했으니, 독일사회민주당이 그것이다. 독일사회민주당은 라살이 조직한 전독일노동자동맹과 아우구스트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끌던 독일사회민주노동당이 1875년 통합해 만든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의 후신이다. 그래서 흔히 '독일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아버지로, 라살의 전술을 어머니로 해 태어났다'고 말한다.

라살은 전독일노동자동맹을 출범시킨 한 해 뒤, 사랑하는 여성을 놓고 한 남자와 결투를 벌이다가 죽었다. 이 죽음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노동운동에 헌신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잊고 경솔하게도 고작 한 여성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그가 한 여성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노동자 계급을 사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우호적 견해도 있다.

고종석/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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