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 종전이 임박해졌지만, 산업현장과 금융시장이 체감하는 경기는 바닥권이다.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도 5%대 중반으로 예측했던 올해 성장률을 4.1∼4.2%로 하향 조정했다. 위기가 과대 포장된 것일까, 아니면 지표가 실물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일까. 한국일보는 7일부터 연재했던 '긴급점검-한국경제 위기인가' 시리즈를 마치며, 향후 경제정책 방향을 듣기 위해 전문가 대담을 마련했다./진행=배정근 경제부장
―현장에서는 위기감이 팽배합니다. 지금이 과연 위기인가부터 논의를 해보죠.
정문건=2000년에서 2001년으로 넘어갈 때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당시 대우채 문제로 금융시장이 경색되고, 주가하락으로 자본시장 기능이 마비됐습니다. 미국의 정보기술(IT) 버블이 꺼지고, 반도체 가격이 원가이하로 폭락했죠. 유가(두바이 기준)도 34달러까지 오르면서 교역조건은 급격히 악화했습니다. 그래서 제2위기설이 팽배하지 않았습니까. 올해는 카드채와 SK글로벌 파문으로 금융경색 기미가 있고, 반도체 가격 급락과 이라크전에 따른 유가상승도 그때와 유사합니다. 2000년 9.3%이던 성장률이 2001년 3.1%로 급락했듯이 올해 성장률도 연초 전망보다 급격히 하락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위기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어려운 상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윤종규=이라크전은 조기 종전이 확실하고, 북핵문제도 파병결정·한미공조를 통해 잘 풀릴 걸로 예상됩니다. 문제는 카드채, 가계부채 등 펀더멘털인데 이를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지정학적 외부충격이 가해지면 언제든지 위기로 갈 수 있죠.
박병원=2000년말∼2001년 상황과 비슷하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실상보다 위기가 부풀려져 있습니다. 위기가 아닌 것을 자꾸 위기라고 하면 심리적 위축이 심해집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올해 성장률을 4.2%로 수정했는데, 1998년 마이너스 6.7%와 비교하면 거리가 한참 멉니다. 2001년의 3.1%와 비교해도 1%포인트나 높죠. 또 KDI가 성장률을 수정할 때는 이라크전의 장기화 우려가 커질 시점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지금 전망한다면 4·2%보다 높게 나올 겁니다. 이런 상황을 위기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한 상황은 과연 무엇으로 표현할지 궁금하군요.
―최근 경제 5단체장들이 외환위기에 버금가는 상황이라고 주장한 것은 과장됐다는 말씀입니까.
정문건=그건 지표경기와 체감경기가 괴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4분기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6.8% 성장했지만, 실질국민소득(GNI) 증가율은 4.1%입니다. 1분기 기업경영분석을 봐도 이익이 몇 개 회사에 집중됐습니다. 지난해 월드컵을 기점으로 내수가 위축국면에 들어선 데 이어 최근 서비스업 활동도 급격히 위축됐습니다. 수출도 반도체 핸드폰 등 일부 품목만 물량기준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또한 재고가 늘어 생산조정이 불가피합니다. 경기침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박병원=지난해 4분기 GNI기준 4.1% 성장이면,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때 괜찮은 겁니다. 이걸 가지고 위기라고 한다면 글로벌스탠더드에 비춰 안 맞는 얘기죠. 이라크전이 끝나고 북핵문제도 한미공조가 복원되면 1분기에 겪었던 것보다는 훨씬 나아질 수 있습니다. 산업은행 조사를 봐도, 대기업 중심으로 올해 설비투자를 작년보다 15.5% 늘리겠다고 합니다. 또 정부가 투자를 가로막는 해묵은 규제들을 완화하면서 LG필립스 등 국내외 기업들의 투자도 기대됩니다.
윤종규=최근 소비위축은 주가하락 등에 따른 자산효과와 가처분소득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심리적 요인 때문입니다. 위기라고 볼 수는 없지만, 기업·금융 구조조정에 있어 미진한 부분이 많습니다. 카드채 문제의 이면을 보면 투신사의 미숙한 위험관리 행태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장제조업체의 3분의1은 아직도 이자보상배율이 1미만입니다. 구조조정과 체질개선 측면에서 갈 길이 멉니다. 또 과거 2년간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1∼2년을 견뎌도 그 여파가 나타날 내년 이후가 더 문제일 수 있습니다.
―내수위축도 문제이지만, 금융시장 혼란을 감안하면 상황은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윤종규=금융시장은 시스템 위기라기보다 일시적 경색입니다. 채권시장 불안은 은행·보험·증권이 투신 부담을 안아주면 차츰 안정될 겁니다. 외화차입도 지정학적 위험이 사라지면 점차 해소될 겁니다. 다만 우량채와 비우량채간 금리 스프레드, 즉 리스크 프레미엄이 벌어지고 있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급격히 벌어지면 곤란하지만, 격차가 커지는 것 자체는 긍정적 효과가 있습니다. 전체 카드사 부채 90조원 가운데, 삼성·LG·국민 등 1∼3위 카드사를 빼면 10조원에 불과한데, 10조원 때문에 카드사 전체가 문제있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 카드사는 시장기능을 통해 퇴출시키는 것이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바람직합니다.
정문건=정부가 대책을 내놓았지만 문제를 덮어둔 상태라는 게 시장의 판단입니다. 차환발행이 어려운 일부 카드사에 대해서는 채권안정기금 등 적극적인 수단을 동원해 해결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박병원=금융시장 불안도 금융당국과 금융기관이 충분히 관리해 나갈 수 있습니다. SK글로벌 건도 도미노처럼 이어질 가능성이 없습니다. 금융기관들이 무분별한 확장경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배우고 있는 과정이죠. 금융기관간 차별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데, 위험요인을 흡수할 수 있는 곳은 지탱할 것이고 역량도 없으면서 무리한 경영을 해온 곳은 심각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일부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 디플레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정문건=스태그플레이션 보다 디플레가 문제입니다. 지난달 물가가 전년 동월 대비 4.5% 급등한 것은 일시적 요인이 크고, 유가를 제외하면 물가는 3%대로 안정추세입니다. 주가 하락과 내수침체, 76% 수준의 공장가동률을 감안하면 오히려 디플레 가능성에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박병원=스태그플레이션은 유가만 안정되면 걱정할 게 없습니다. 주시해야 할 것은 자산가격이 폭락하고 장기불황이 이어지는 일본식 자산디플레인데, 아직 수도권 주택보급률이 92%, 서울이 83%로 이들 지역은 기회만 있으면 자산가격이 올라갈 위험이 있어 오히려 걱정입니다. 토지공급도 수요를 못따라 가고 있고, 주가하락도 내생적 요인보다 북핵문제 등으로 외국인들이 주도하고 있죠. 자산디플레를 걱정할 단계는 아닙니다.
―정부 대책이 경기 후행적이라는 비판도 많은데 어떤 대책들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정문건=통화정책과 관련, 카드채와 SK글로벌 파문, 북핵문제 등으로 금융경색이 있는 만큼, 금리를 인하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기부양 측면이라기보다 금융시장의 악순환과 경색을 풀어주자는 거죠. 정부가 재정을 조기집행한다고 하지만, 과거 경험을 볼 때 별 실효성이 없습니다. 지금은 기업이 여력이 있어도 투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상반기중 적자재정을 편성해서 정부가 투자 주체로 나서야 합니다. 재정지출은 사회간접자본·부동산쪽보다는 2000년 거품이 팽창한 이후, 수요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정보기술(IT) 분야 수요기반을 확충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윤종규=IMF이후 국가채무가 늘어나고, 연기금의 적자도 우려되는 상황에서 적자재정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기업의 심리적 위축을 막는 게 중요한데, 기업환경 개선과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를 위한 과감한 정책이 나와야 합니다.
박병원=금리가 높아서 투자를 않는 게 아닌 점을 고려하면, 통화정책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기는 힘듭니다. 금융경색 해소차원이면 모르겠는데 경기활성화 효과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지켜보고 있는 단계입니다. 적자재정과 관련해서는, 사회복지비 지출확대 등 향후 재정여건이 좋은 것만은 아닌 상황에서 균형재정은 중요한 정책목표입니다. 균형재정은 호경기-불경기의 한 경기사이클을 넘어서까지 적자를 내지마라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매년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적자재정을 하려면, 이 같은 인식의 변화와 정치·사회적 여건이 성숙돼야 합니다. 정책 수단이 없어서가 아니라,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할 타이밍을 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정리=유병률기자 bryu@hk.co.kr
사진=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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