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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화코드]<8·끝> 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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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화코드]<8·끝> 노마드

입력
2003.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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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유목민'1만년 전 인류는 유목민이었다.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면서 떠돌이로 살았다. 농경이 시작된 뒤 정착민에게 유목은 잊어버린 습성이 됐다. 그러나 21세기가 열리면서 인류는 떠돌이의 자유와 불안을 다시 경험하고 있다. 노트북과 휴대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외부와 접속하며 이동하고, 일정한 직장과 주소에 얽매이지 않는 '디지털 유목민'이 이미 등장했다.

디지털 유목민의 등장은 일찌감치 예견됐다. 30여년 전 미디어 학자 마셜 맥루헌은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전자제품을 이용하는 유목민이 될 것이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지만 어디에도 집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프랑스 사회학자 자크 아탈리는 "21세기는 디지털 장비로 무장하고 지구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Nomad)'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디지털 노마드가 가장 많이 몰려 드는 곳은 정보기술 (IT) 산업의 메카인 미국 실리콘밸리일 수도 있다. 유목민이 오아시스를 찾아 가듯 일감을 찾아 아시아 등 해외에서 몰려 드는 디지털 유목민이 매년 5만여 명에 이른다.

유목, 혹은 유목적(Nomadic) 행동·의식은 국내에서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카피를 내세운 휴대폰 광고는 신세대의 노마딕한 사랑법에 착안한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식의 정착·농경민적 사랑법은 옛날 얘기가 돼 가고 있다.

일상 소비 행태에서도 노마드적 경향은 중요한 흐름을 이루고 있다. 지난해 9월 삼성경제연구소는 소비시장 분석 보고서에서 "자유와 개방, 홀가분하고 쾌적한 삶을 추구하는 노마드족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의 유목 성향이 21세기의 주도적 소비 흐름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 지표로 신용카드 시장의 확대, 패스트푸드와 테이크아웃 음식점의 확산, 휴대폰 판매량의 급증과 부가 서비스 이용 증가, 자동차 운행 중 위치와 도로 안내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텔레매틱스 서비스 확대 등을 꼽았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삼성경제연구원 최순화씨는 "가전기기를 비롯한 모든 사물을 컴퓨터 네트워크에 연결하는 유비쿼터스 혁명의 도래로 유목적 삶의 방식은 앞으로 더욱 빠르고 강하게 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흩어진 개인 순식간에 대집단으로

노마드적 흐름을 보여 주는 이런 현상의 보다 근본적이고 극적인 징표는 지난해 월드컵 축구대회 당시 세계적 화제를 부른 '붉은악마', 미군 장갑차 희생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위력을 발휘한 '노사모', 최근의 반전시위로까지 이어진 사회적 사건이다. 이들 사건에서 낱낱의 점으로 흩어져 있던 개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뜻을 모으고, 일시적으로 거리에 몰려 나와 놀라운 에너지를 발산했다.

노사모는 거대 정당 조직을 능가하는 힘을 보이며 기존 선거 관행을 깨뜨렸다. 중앙집중식 기존 조직과 달리 이들은 흩어져 있다가도 쟁점이 있으면 일시에 거대 조직에 맞먹는 숫자로 모여 들었다.

단순한 투표로 끝나지 않고 적극적인 선거운동으로 정치를 정치인과 정당으로부터 일반 시민의 몫으로 가져 왔다. 이들의 창조적 파괴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말한 '노마디즘'과 상통한다. 주어진 가치체계와 코드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되 거기 머물지 않고, 새로운 영역으로 계속 옮겨 다니는 노마드의 존재·사유 방식을 닮았다. 의식의 바탕에 깔린 '민족'이라는 반(反) 노마드적 요소만 빼고 보면 붉은악마 촛불시위, 최근의 반전시위까지도 극히 노마드적이다.

들뢰즈의 노마디즘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학문공동체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연구원 고병권씨는 "노사모는 지역·성별·계급에 따라 갈라졌던 기존 정치 공간을 가로질러 다양한 개인이 집결했다는 점에서 노마드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이 인터넷을 통해 만난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흐름"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여름 광장의 붉은악마가 연말의 촛불시위에 참여하고, 다시 반전·평화시위에 합류하는 현상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과 가치를 찾아 떠나는 노마드의 궤적을 보여준다.

그는 "노마드의 핵심은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기존 영역을 횡단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학교라는 정규교육 체계를 떠난 청소년들의 대안공간 '하자센터'에서 스스로 공부하고 작업하는 10대들, 이라크로 인간방패가 되어 떠났다가 돌아와 정부의 파병 결정에 항의하며 국적 포기를 선언한 사람들 등도 한국판 노마드라고 할 수 있다.

"단순 이동 넘는 창조와 탈주를"

이동―창조―탈주를 거듭하는 들뢰즈식의 노마드 개념에 비춰볼 때 지금 국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노마드는 창조와 탈주보다는 이동, 특히 물리적 공간 이동의 자유에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다. 그러나 유목민의 자유는 안정된 궤도를 벗어나는 데서 오는 결핍을 견디며 홀로 서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자유기업원 원장, 벤처기업 CEO를 거쳐 지난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경영연구소를 차리면서 1인 기업가로 독립한 공병호씨. 집에서 혼자 일하며 생필품 구입을 비롯한 일상생활부터 업무까지 모든 일을 휴대폰과 컴퓨터로 처리하는 그는 "1인 기업가의 홀로 서기는 철저한 자기관리가 있어야만 가능한 치열한 싸움"이라며 "순간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단순한 이동의 자유를 넘어 삶과 사유의 지평에서 창조와 탈주를 반복하는 노마드의 에너지는 월드컵과 대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젊은 세대를 텃밭으로 이제 막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가져올 변화의 물결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크게 바꿔 놓을 게 분명하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 철학적 개념

'노마드'가 자연의 제약을 상당 부분 벗어났다고 할 현대 사회와 문화, 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 자리잡은 데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의 공이 컸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1969)에서 풀어낸 노마드의 세계는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이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monad·단자)가 자신 속에 모든 것을 가진 데 비해 들뢰즈의 노마드는 끊임 없이 돌아다니며 시각을 통해 자기를 확장한다. 모나드가 한계 내에서 자기 충족이라면 노마드는 자기를 부정하고 끊임 없이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 나간다. 자족적이지 않다는 것은 상대의 존재, 그에 따른 관계 없이는 자신이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신체 없는 정신, 죽음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해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저 '천(千)의 고원'(1980)을 해설한 '노마디즘'(휴머니스트 발행)을 낸 이진경씨는 '노마디즘'에 대해 "유목민적 삶과 사유"라고 풀었다. 그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목한 유목적 삶은 그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라 불모지에 달라붙어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가는 것"이라며 "노마디즘은 제자리에 앉아서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붙박지 않고 끊임 없이 탈주선(線)을 그리는 사유의 여행"이라고 설명했다.

아탈리는 문화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 '노마드'를 즐겨 썼다. 그는 미래사회의 중요한 척도가 될 400여 개 키워드를 풀이해 99년에 낸 '21세기 사전'(중앙M&B 발행)에서 '도시 유목민'을 이렇게 풀었다. '우리는 정착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유목 생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목동의 유목이 아니라 도시의 일반화한 불안정한 유목으로 돌아갈 것이다. 직업, 주거환경, 가정은 자주 바뀌게 된다.'

그는 미래의 유목민을 3종류로 예측했다. '극빈 유목민은 멀리 가지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단순히 먹을 것을 위해 이동한다. 계층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층은 모든 커뮤니케이션, 창조 수단에 접근할 수 있는 부류이며 중간층은 다른 사람들의 유목을 관망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가상 유목민이다.' 그는 몸만 떠도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유목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필요하고, 그래서 미래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이성보다는 직관, 힘보다는 예의와 부드러움'이라고 그는 부연한다.

미래학자이자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주필을 지낸 군둘라 엥리슈는 '노마드'를 직업의 다양화와 변화라는 실용적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잡노마드(Jobnomad) 사회'(문예출판사 발행)에서 직업을 따라 유랑하는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들은 한 직장, 한 지역, 그리고 한 업종에 매달리지 않고 승진 경쟁에 뛰어 들지도, 회사를 위해 목숨을 걸지도 않는다. 결핍을 극복하는 능력, 본질에 집중하는 힘, 경험을 활용하는 기술 등 과거 유목민의 기질을 체득, 직업 세계에서 자유만이 진정한 안정의 길임을 보여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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