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은 보통 오전 11시에 문을 열어 자정에 문을 닫았는데, 우리 팀은 오후 7시∼10시에 머물렀다. 인기가 높았던 우리는 하루에 두 차례씩 쇼를 펼치는, 이른바 투 쇼(two show)팀이었다. 그래서 보통 한 달에 평균 45차례 무대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투 쇼를 펼칠 경우, 오후 3시에 클럽에 도착해 4시∼6시에 첫 무대를, 7시∼ 9시에 두번째 공연을 가졌다. 그런 날은 정말 숨 돌릴 틈도 없었다. 여타 팀들은 한달에 열흘 정도 공연이 일반적이었다.음악은 물론 미국식 쇼 문화에 눈을 뜨게 된 패키지쇼란 문자 그대로 단원들이 모두 참여하는 형태의 공연물이었다. 비둘기 쇼, 카드 쇼 등의 마술, 아크로바트나 판토마임 등의 고난도 공연, 미국인들이 했던 영어 코미디 등 나름대로 전문적인 기예가 필요했던 것 말고는 우리가 각자 나눠 했다.
예를 들어 나는 마술 흉내 코미디가 장기였다. 당구 큐대에 당구공을 하나둘씩 꿴 다음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매고 들어 가는 것이었다. 실은 미리 구멍을 뚫어 둔 당구공이었다. 팔자에 없던 마술을 한 것은 다른 멤버도 마찬가지다. 우습게 생긴 단원에게는 마이크를 역기처럼 드는 등 간단한 코미디가 맡겨졌다. 그렇게 누구나 다 함께 참여하는 쇼를 만들어 하나의 종합적 무대를 꾸민다 해서 패키지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 당시 AFKN은 내게 새 음악을 접하는 유용한 통로일 뿐 아니라, 마술 무대의 아이디어를 얻는 창구이기도 했다. 스프링 버라이어티 마술 쇼의 대부분은 미국 방송을 끼고 살았던 내가 구상했 다. 나뿐만 아니라 거기서 근무하던 한국 연예인들도 모두 여기저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머리를 짜내는데 골몰했다. 연주나 노래는 물론 그 속에 담고 있는 감각과 의미까지 습득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그 무대는 한국 연예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비록 쇼적인 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긴 했지만, 이 시절의 경험이 있었기에 이렇게 음악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것이다. 거기서 통하는 음악이란 전적으로 미군의 취향에 맞는 것이긴 했는데, 그것은 결국 그들 특유의 문화적 우월감이었다. 음악적으로는 완전히 백인 취향 일변도였다. 재즈를 한다 해도 비밥 같은 흑인 재즈가 아니라, 베니 굿맨이나 글렌 밀러 같은 백인 재즈만 하기 일쑤였다. 이런 맥락에서 클래식적 선율에 재즈적 리듬이 깔린 랙 타임 또한 자주 연주했다. 나는 록은 물론 재즈에서 컨트리적인 음악까지, 미국 음악의 모든 것을 섭렵했다.
그처럼 유럽과는 전혀 다른 미국적인 백인 음악이 미군 무대의 래퍼터리였으나 단 한가지, 순수 컨트리 뮤직만은 하지 않았다.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컨트리 뮤직과 록을 결합한 형태까지가 우리의 몫이었다. 완전 미국 토박이의 컨트리 음악은 나의 음악성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기도 했지만, 또다른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컨트리 음악을 반기는 클럽이 없었던 것이다. 미군 클럽 중에는 시골 카우보이의 클럽이 있긴 했으나, 가뭄에 콩나기였다.
미 8군 무대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또 하나 있다. 미 8군 무대라 하면 언뜻 일반 클럽과 같은 유흥업소만 생각하기 쉬우나, 음악 공연만 하는 곳도 있었다. 바로 서비스 클럽이란 곳이다. 거기선 음료수를 절대 팔지 않았다. 내겐 미 8군이라 하면 거기가 제일 먼저 떠 오를 정도로, 그 클럽은 뮤지션의 천국이었다.
일반 클럽이야 커봤자 200평인데, 그 곳은 300∼400평 크기의 콘센트 건물이었다. 주로 공연장, 게임 홀, 군대 내 행사 등의 용도로 쓰였는데 관중도 많고 음향도 괜찮아, 연주하는 나 스스로부터 기분이 좋아 졌다. 연주 일정은 일반 클럽 공연의 2할 비율로 잡아줬는데, 보수는 클럽 연주와 똑 같았다.
늘 미국인들을 대했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미국 사람은 없다. 미 8군 장교가 기타를 배우고 싶다며 부탁해 와 세 번 직접 가르친 적은 있으나, 내가 워낙 바빠 기초도 제대로 못 가르쳤다. 다른 군인들은 부대서 우연히 부딪치면 반갑게 아는 체를 해, 콜라나 함께 마시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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