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글을 쓰시나요? 명예 때문에?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에…." 문학대담 뒤끝에 한 독자가 단 위에 앉아 있던 소설가들에게 물어왔다. 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내 마음은 질문을 받는 순간부터 허둥거렸다. 왜 쓰는가? 스스로 그만큼 잦게 물어보았으니 지금쯤 그런 자리에서 선뜻 꺼내놓을 답안 하나쯤 마련했을 법도 한데, 여전히 그런 물음을 받으면 아뜩해진다. 분주하게 떠오르는 생각 가운데 하나를 잡아서 이건가, 하고 말로 가다듬고 보면 어딘지 모르게 미흡하다. 저건가, 하고 다른 것을 집어들어도 마찬가지다. 왜 글을 쓰는 것일까, 왜 쓰냐는 물음에 변변한 대답도 못하면서.어린 시절,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오빠들은 귀향할 때면 책읽기를 즐기는 막내동생에게 책을 선물했다. 늘 책에 허기져 있던 나는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치웠다. 포만감은 잠깐, 또다시 전보다 더한 헛헛함을 느껴야 했다. 방학 때면 오빠는 친구네 집에서 책을 빌려다 주었다. 친구의 아버지인 경찰관이 책읽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와도 그렇게 만났다. 모조가죽 장정이 두툼하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은 그때까지 읽어온 여느 책과 달랐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고, 그 책에 그어진 밑줄이 그러했다. 자를 대고 그은 단정한 밑줄과 군데군데 써넣은 메모는 책주인이 남긴 것이었다.
그때까지 내게 경찰관은, 소읍의 무료한 분위기를 닮은 표정으로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사람이거나 명절 때면 아버지의 일터에 들러서 떡값을 챙겨가는 의뭉스러운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장에 밑줄을 긋는 경찰관이 있다니.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려내는 세계의 강렬함과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경찰관이 속한 남루하고 밋밋한 일상, 그 괴리가 내 마음에 골을 팠다. 그는 그 괴리를 어떻게 견디는 걸까. 그게 그렇게 궁금했다.
시를 쓰던 대학시절, 문학회 선배가 "너 소설 한번 써봐라" 하고 말하는 바람에 공책에 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무렵, 친지 한 사람이 산동네 어귀에 지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어느 은행에서 사원들에게 분양한 아파트였다. 그리 호사스럽지 않은 아파트인데도 그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은 산동네와 아파트 사이에 선을 긋고 싶어했다. 원주민인 산동네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의 말투에서는 경계심과 경멸이 거리낌없이 묻어났다. 처지가 조금 다르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테두리를 두르려 한다는 게 놀라웠다. 친지의 집에 들렀다 나올 때면 공연히 산동네의 골목을 어슬렁거리게 되었다. 연탄창고로 쓰이는 낡은 철제 캐비닛, 개천에 버려진 쓰레기와 연탄재, 낮부터 골목 안 구멍가게 앞에서 술을 마시는 사내…. 풀죽어 납작 엎드린 짐승처럼 슬퍼 보이던 동네. 고향집, 결혼해서 분가한 오빠가 비운 넓은 이층방에서 여름방학을 나는데 그 산동네가, 거기에서 사는 이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파트 주민들이 하시도 잊히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거리낌없이 배척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남을 경멸하는 이들은 자기가 속한 터전이 언제까지나 공고하게 유지되리라고 믿는 것일까. 마음속에서 궁그는 의문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소설을 한 편 쓰게 되었고 그 소설로 등단하게 되었다.
어느날 문득 '그는 왜 그랬을까?' 하고 의문이 솟구치거나 오랫동안 잊고 지냈는데 마음속에서 가만가만 어떤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다. 누군가가 들려준 이야기의 한 토막, 신문에서 본 짤막한 기사, 오래 전에 잠깐 스친 사람이. 어느 해안도시의 가풀막진 골목에서 건어물을 인 할머니 행상이 흥얼거리던 "이걸 팔아 무얼 하나, 논을 사나 밭을 사나…"라는 가락, 방학 때면 서울에서 내려와 동네 아이들과 서름하게 지내던 읍내 다방 마담네 오누이가 기대어 있던 삭은 블록 담장 같은 것이. 그걸 글로 쓰다 보면, 비린 생선 몇 마리를 이고 비탈진 길을 오르던 노인의 고단한 한살이가, 방학 때만 내려와 시골 아이들과 조심스럽게 섞이던 오누이의 마음에 어렸을 서먹한 무늬가 그제야 어렴풋이나마 만져진다. 사람과 사람살이의 불가해함 앞에서 막막해진 채 글로 더듬적거리노라면,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그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뒤늦게나마 그 결이 느껴지는 것이다.
타인과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그런데 왜 하필 숱한 나무들을 베어 없애는 문학이어야 하는가. 관공서의 묵은 서류 더미를 헤치며 한평생을 보내거나 아이를 키우고 좁다란 집안에서 표 안 나는 가사노동을 반복하거나 땅을 파고 씨를 뿌려 거두는 일을 하면서도 인생에 대해서 터득할 수 있을 텐데. 언젠가 독자가 던진 "왜 글을 쓰는가?" 하는 질문에서 나는 그런 매서운 지적을 느꼈다. 그날,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말했다.
한때 나는 글쓰기를 '내가'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쓰고 싶으면 쓰고 말고 싶으면 말아도 되었다. 글이 진실을 다 담을 수 없을 뿐더러 때로는 부분적인 사실로써 전체적인 진실을 호도하거나 왜곡한다는 절망, 그리고 그 밖의 이유들 때문에 등단하고 나서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 동안 글을 못 쓸 때에도 그런 마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등단시켜 준 분들께 죄송한 마음은 있을지언정 글을 안 쓰는 데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그런데 그 세월을 건너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 하느님이라 해도 좋고 삼신할머니라 해도 좋을 어떤 힘이 사람마다 각각 다른 몫을 지어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순한 마음을, 어떤 이에게는 아름다운 외모를, 어떤 이에게는 강인함을. 또 어떤 이에게는 정신이나 신체에 장애를 갖게 해서 주변 사람들을 성숙하게 만드는 역할을 맡기기도 할 것이다. 어떤 목숨도 쓸모없이 세상에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건 무엇일까. 요조모조 따져도 짚이는 게 없었다. 억지로 찾아내자면 손톱만한 글재주뿐.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그건 '내 것'이 아니었고 내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라고.
중언부언 말을 맺고 났는데 뭔가 미진했다. 그러니 내 글쓰기는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하는 도구일 뿐이고, 그를 통해 사람들이 차이를 인정하고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데 모래알 하나만큼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고 꼭 집어 말하지 못해서 그런가? 하고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깨달았다. 퇴고할 때의 기쁨에 대해서도 말했어야 공정한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원고를 쓰고 나서 다시 읽어가며 고칠 때 누리는 부끄러움 섞인 환희. 어떤 부분에서는 공연히 근사하게 말을 꾸미려 했고, 어떤 대목에서는 감정을 과장했고, 좀 더 밀고 나가야 했는데 주춤거리다 어물쩍 넘어가버린 데도 있다. 내가 쓴 글을 보면서 나와 맞대면하는 일, 내가 쓴 글을 다듬어가면서 나를 가다듬는 기쁨이 없었다면, 제 아무리 근사한 명분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글쓰기로부터 달아날 궁리나 하고 있을 것이다.
오래 전, 박경리 선생의 수필집에서 "생명에 대한 연민 없이, 나르시시즘의 극복 없이 글쓰지 마라"는 말씀과 만났다. 그 말씀은 내가 어슴푸레 지녀왔던 생각과 일치한다고 여겨져서, 갓 문학에 입문한 이들을 만나면 자주 인용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생각이 바뀌었다. 혹 형형한 이상을 지니고 명예욕이나 다른 무엇 때문에 글쓰기를 시작한다 하더라도, '왜 쓰는가?'를 자꾸만 곱새겨 가며 글을 쓰다 보면 언젠가는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뭇 목숨과 동체대비하는 데 이르지 않겠는가, 하고. 무진 애를 쓰며 써나가다 보면, 글이 쓰는 사람을 그리로 이끌어주지 않겠느냐고.
● 연보
1960년 충남 보령 출생
1982년 경희대 국문과 졸업·계간 '세계의문학'에 중편 '우리들이 떨켜' 발표 등단.
1982∼83년 여수 중앙여고, 당진 송악고 교사
소설집 '그 집 앞' '꽃그늘 아래' 장편 '길 위의 집' 등
오늘의작가상(1995) 한국일보문학상(1998) 현대문학상(2002) 이효석문학상(2002)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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