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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대통령의 사람들]<6>권력의 균열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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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대통령의 사람들]<6>권력의 균열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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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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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로비 사건이 온 나라를 뒤흔든 지 반년이 넘은 1999년 12월 9일. 박주선(朴柱宣) 전 법무비서관에게 한광옥(韓光玉)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비서실장실에 들르라는 것이었다. 박 전 비서관은 옷 로비 사건에 대한 사직동팀의 최초 내사보고서를 당사자인 김태정(金泰政·내사 당시 검찰총장)씨에게 유출했다는 혐의로 보름 전(11월 26일) 물러난 상태였다.박 전 비서관은 위로와 격려를 해주려고 부른 것으로 기대하고 청와대를 찾았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분위기는 썰렁했다. 한 실장은 박 전 비서관이 1주일 전인 12월 3일 검찰에 소환돼 조사 받는 과정에서 최초 보고서 유출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 것을 거론했다.

한 실장은 "최초 보고서를 김태정씨에게 전했다고 하던데 사실이면 밝혀라"고 자백을 권했다. 박 전 비서관은 "최초 보고서는 본 적도, 전해준 적도 없다"고 부인하면서 "전말을 알아보고 그런 말씀을 하라"고 섭섭한 심경을 토로했다. 한 실장은 "알았다"고 말하고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박주선(현 민주당 의원)의 회고. "한 실장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이 사건에서 빠져 나오기가 어렵겠구나'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실장이 나에게 자백을 요구한 데는 신광옥(辛光玉) 중수부장의 부탁이 있었을 것이다. 한 실장이 검찰의 부탁이 있었다는 뉘앙스의 얘기를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크리스마스 다음날(99년 12월 26일) 박 전 비서관은 대검 중수부에 의해 공무상 비밀누설 및 증거은닉 혐의로 구속됐다. 박주선은 1급 비서관이었지만 그의 위치는 청와대 사정의 총괄자로서 수석이나 장관 이상이었다. 국가기강 확립과 고위층 부패 감시를 담당하는 사정 총괄자의 구속은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DJ 정권이 겪어야 할 숱한 시련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그와 김태정 전 장관의 구속은 일단 여권이 길고 긴 옷 사건의 터널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해준 해법이었다.

한광옥 민주당 최고위원은 "당시 검찰이 자백 유도를 부탁한 일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박주선 구속을 청와대와 검찰의 조율 결과로 보는 시각을 부인한 것이다. 그러나 한 최고위원은 "그 때는 국정이 옷 사건에 발 목 잡혀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면서 "조속히 옷 사건을 매듭지어야 한다는 인식이 여권 내에 퍼져 있었다."고 말했다. 법적인 판단이 어떻든 간에 정치적 차원에서는 누군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공보수석이었던 박준영(朴晙瑩)씨는 "박주선의 구속을 보는 청와대의 심정은 억울하지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박 전 수석은 박주선의 최초 보고서 유출 혐의가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점(2001년 11월 5일)을 들며 "승복하지 않으면서도 구속을 감수한 것은 굴복이었다.버텼어야 했다"고 말했다.

DJ도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박주선의 '단죄'를 묵인했다. DJ의 정서를 보여주는 한 대목.

박 전 비서관이 보석으로 풀려난 다음날(2000년 1월 15일) DJ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DJ는 "박 전 비서관이 구속된 후 울화 때문에 밤에 잠이 잘 안 온다. 회의도 취소한 적이 있다. 나도 사형선고를 받아 보았기 때문에 그 억울함을 잘 안다"고 위로했다. 박 전 비서관은 "이번에 들어가보니 사형선고를 받았던 대통령님의 한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라며 "그 일을 위로로 삼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박 전 비서관은 "반드시 무죄를 받을 것입니다"라고 다짐했고 DJ는 "그렇게 하라"고 격려했다.

DJ가 위로 전화를 한 경우는 두 차례 더 있었다. 박 전 비서관이 구속됐을 때 부인에게 전화를 했고, 그리고 무죄 선고를 받았을 때였다. DJ는 어쩔 수 없이 박 전 비서관을 내치는 결정을 했고 그에 대해 줄곧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박주선이 청와대에서 물러나기 이틀 전(99년 11월 24일) DJ에게 사의를 표명했을 때도 그랬다. 박주선은 "옷 사건의 진상은 보고 드린 대로 은폐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로 국정이 뒤엉켜 있으니 책임져야 하겠습니다. 제가 나가면 조용해지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DJ는 "법적으로 책임질 일이 없는데 여론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다. DJ는 "장수가 최선을 다했어도 전장에서 지면 물러나야 한다"는 박주선의 거듭된 사의에도 "좀 두고 보자"고 말했다.

그러나 동교동계 등 핵심 인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총선(2000년 4월 13일)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옷 사건을 빨리 매듭지어야 했고 박주선은 물론 그 이상의 희생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를 전후해 동교동계는 내밀하게 움직였다.

동교동계가 어떤 해법을 모색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박 비서관의 사의 표명 후 그 즈음 청와대에 입성한 한광옥 실장과 남궁진(南宮鎭) 정무수석은 "정말로 물러날 생각이냐"고 물었다. 박 비서관은 "국가원수에게 거짓 제스처를 하겠느냐"고 말했고 한 실장 등은 "그러면 다시 한 번 전화로 진심을 전하고 물러나는 게 좋겠다"고 종용했다. 결국 DJ도 사표를 수리했고 "무엇을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박 비서관은 "친정(검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했고 "기다려보라"는 DJ의 말을 들었다. 이 때문에 한 실장이 청와대에 들르라고 했을 때 엉뚱한 기대를 했던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동교동계의 대책회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박주선 의원의 증언. "보석으로 풀려난 후 보름쯤 지난 2000년 1월말 힐튼호텔 커피숍에서 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장관을 만났다. 나는 구속되리라고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속이 끓고 있었던 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박 장관은 '대통령을 모시다 보면 희생이 있어야 할 때도 있다'고 말하더라. 나는 '희생 당할 일로 희생당해야지,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박 장관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동교동계 몇 사람이 모여 옷 사건을 끊고 2000년을 새롭게 맞이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는 얘기를 하더라."

박주선의 증언은 법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논란을 남기고 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신광옥씨나 불리한 증언을 했던 최광식(崔光植) 전 사직동팀장(현 경찰청 혁신기획단장)은 "최초보고서 유출자는 박주선이라는 검찰 수사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적 측면에서 여권이 희생양을 모색했다는데 반론이 없는 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대목은 권력 구도 측면에서 박주선의 낙마가 신주류의 퇴진, 구주류의 전면 포진을 의미한다는 점이었다. 신주류로 분류됐던 이강래 정무수석, 이종찬(李鍾贊) 국정원장은 이미 99년 3월, 99년 5월 물러났고 옷 사건의 와중에서 11월 23일 김중권(金重權) 비서실장이 퇴진했다. 대신 청와대에는 한광옥 비서실장과 남궁진 정무수석이, 당에는 김옥두(金玉斗) 사무총장과 정균환(鄭均桓) 특보단장, 국정원에는 천용택(千容宅) 원장과 엄익준(嚴翼駿) 국내담당 2차장, 김은성(金銀星) 대공정책실장이 포진했다. 그리고 권노갑(權魯甲) 고문이 4·13 총선 물갈이와 교통정리를 맡으면서 명실상부한 '권부(權府)'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동교동계이거나 동교동계의 영향을 받는 인사들이었다. 동일한 색깔의 포진으로 당정 협조가 원활해진 측면도 있었지만,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 부정적 측면도 있었다.

박주선의 구속 후 청와대 민정수석을 맡은 신광옥 중수부장 역시 전남 출신인데다 동교동계의 우위가 굳어진 권력 구도에서 견제보다는 공조에 비중을 두었다. 신 수석은 오자마자 인사담당 공직기강비서관에 광주일고 후배인 이만의(李萬儀)씨를 두었다가 DJ의 '특정고 인맥' 지적 후 곧바로 이 비서관을 교체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 사건으로 신 수석은 권력 실세들을 견제할 힘을 잃었고 오히려 권 고문이나 대통령 아들들과 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견제와 균형의 부재는 각종 게이트를 사전에 막지 못하는 한 원인이 됐고 대통령 아들들과 사정 총괄자인 신 수석의 구속을 초래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신 수석은 박주선 구속 일로부터 꼭 2년 후인 2001년 12월 26일 박 전 비서관 밑에서 사정을 담당했던 홍만표(洪滿杓) 검사에 의해 구속돼야 했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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