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설 연휴, 국민은행 김영일 부행장은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연휴 바로 전날, 신상품개발팀의 젊은 후배들이 너무나 파격적인 제안을 했기 때문이었다. 새로 개발한 적금통장 홍보를 위해 은행장이 직접 인형복장을 하고 길거리에 나서 달라는 것이었다. 보수적인 은행계 풍토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어떻게 은행장한테 탈바가지를 써달라고 부탁하나…"연휴가 끝나자마자 김 부행장은 각 부서 팀장 10명을 불러 의견을 조사했다. 정확히 5대 5로 의견이 갈렸다. "에라, 모르겠다. 말이나 꺼내보자." 김 부행장의 제안에 김정태 은행장은 의외로 흔쾌히 수락했다. "재미있겠습니다. 은행에 이익이 되면 해야지요." 그리고 곧바로 두터운 털로 덮인 캥거루 복장을 입고 길거리에 나서 깜짝 쇼를 펼쳤다. 국민은행 최대의 히트 상품인 '캥거루 통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캥거루 통장'은 지난해 2월 18일 출시된 이후 올해 4월 4일까지 무려 63만5,780명이 가입해 5,448억200만원의 수신액을 올린 어린이·청소년 전용 적금통장. 적금이면서도 2년 이상 가입하면 2년에 3차례 이자(연리 4.2%) 손해 없이 인출할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학원비, 컴퓨터 구입비 등 목돈 마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적금을 깨야 했던 보통의 부모로서는 귀가 솔깃할만하다.
여기에 적금 가입과 동시에 종합상해보험에 가입, 어린 자녀들이 겪을 수 있는 각종 위험에 대비하는 보험 성격도 눈길을 끈다. 소아암, 교통상해, 유괴, 납치, 화상, 골절, 식중독, 집단따돌림에 따른 정신피해 등 웬만한 보장 내용은 다 갖췄다. 한마디로 '꿩 먹고 알 먹고'이다. 3월말까지 지급된 보험금은 8억9,000만원.
'적금은 만기가 돼야 찾는다'는 기존 관념을 깨부순 '캥거루 통장'은 탄생부터 범상치 않았다. 2001년 11월 신개념 금융상품 개발을 위해 외부 마케팅 전문가들을 영입해 신상품개발팀을 구성한 것이 첫 단추였다.
굿모닝신한증권 김민석 차장(현 프라이빗뱅킹 차장), P&G의 박경숙 과장(현 개인고객본부 마케팅팀 과장) 등이 이때 합류했다.
이들은 팀이 구성되자마자 김 부행장의 표현을 빌리면 "은행원 머리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신상품개발팀은 우선 서울에 사는 주부 24명을 모았다. 일단 금융 소비자들의 생각을 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엄청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이 명의로 적금을 들었는데 예상치 못한 사고로 치료비가 필요해 통장을 깬 적이 있어요." "교육보험을 들었는데 피아노 구입자금 때문에 중도 해약하니 원금밖에 안 주더군요."
이 같은 불만은 곧 새로운 상품개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상품구조를 짜는 일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고객 명의의 단체 가입으로 은행이 보험사(동부화재)에 내야 하는 보험료를 대폭 할인받고, 최소한의 자금운용을 위해 최소 통장잔액을 100만원으로 정하는 등의 일이 1개월 만에 끝났다.
남은 것은 적금 이름을 짓는 일. 최종 후보는 영어 '플랜(Plan·계획)'과 '퓨처(Future·미래)'의 합성어인 '플래처'와 '캥거루'로 압축됐다. 팀장 10명의 의견은 절반씩 갈렸다. 이번 결정도 개인고객본부장인 김 부행장의 몫이었다. "캥거루가 더 좋았습니다. 플래처는 뜻은 좋지만 어린이 상품 이름으로는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죠. 무엇보다 캥거루는 아이들에게 친근한 동물이면서 모성보호의 이미지를 담고 있거든요."
어린이날을 앞두고 '캥거루 통장'의 후속 마케팅을 준비중인 박경숙 과장은 "신상품개발팀의 표어는 '상품이 아니라 솔루션(해결책)을 판다'는 것"이라며 "은행장에게 길거리 마케팅을 부탁한 것도 '캥거루 통장'은 은행 최고경영자(CEO)가 추천하는 상품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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