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을 때의 일이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YS는 청와대 옆의 안가(安家)를 철거하라고 지시한다.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시해한 10·26사건이 벌어진, 세칭 '궁정동 안가'는 대통령이 비공식적인 만찬이나 주연(酒宴)을 갖는 등 권력의 음습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장소였다. '군사문화의 청산'을 '개혁'과 동일시했던 YS가 이곳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중장비를 동원해 시원하게 안가를 부수는 장면은 TV 뉴스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됐다. 그 자리에는 공원이 꾸며져 외국인 관광객도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대통령도 사적인 장소가 필요하다"는 소수의 반대를 무시하고 멀쩡한 고급주택을 무작스럽게 때려부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잘한 일이다. '옳다' 싶으면 앞뒤 재지않고 미련하게 일을 추진하는 YS다운 일이었다.
그 일과 관련해서 당시 정치부 기자였던 나는 청와대 관계자로부터 핀잔을 들은 기억이 있다. '건물을 지을 때도 허가 받아야 하지만 철거할 때도 주무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사석에서 만난 청와대 관계자에게 "혹시 종로구청의 허가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전혀 생각치 못했던 질문이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좋은 일도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나에게 그는 "큰 일을 하자는데 그런 사소한 게 그리 중요하냐"고 면박을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법치'(法治)보다는 '인치'(人治)에 의존했던 YS의 개혁이 결국 '문민독재'라는 비판을 받게 될 것임을 예고한 작은 사건이었다.
이제 출범한 지 겨우 한달 반밖에 안 된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를 보고 있자니 자꾸 그때의 일이 생각난다. 물론 그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차적 정당성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또 국무회의를 비롯한 각종 회의에서 토론이 활발하게 살아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노 대통령도 역시 법치보다는 인치'라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모처럼 법률가 출신의 대통령을 맞았는데도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솔직함이 두드러지다 보니 좌충우돌식으로 비쳐지는 그의 언행 때문일까. 아니면 "그때 그때 상황에 맞는 표현을 쓴다"는 본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말을 바꾸는 것처럼 보여서 그럴까. 한참을 생각한 끝에 "나는 부도덕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무오류성(無誤謬性) 때문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대통령은 자의적인 인사권을 행사하지 말라"는 평검사들의 요구에도, 자신이 KBS 사장에 서동구씨를 추천했다고 인정하면서도, 노 대통령은 '내가 떳떳하기에 잘못된 게 없다'는 식의 자세를 보였다. 청와대 참모들도 "대통령이 마음대로 하면 달라진 게 무엇이냐"는 지적에 걸핏하면 "이전의 정권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을 교조적으로 되뇌곤 한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권력'은 모든 행위에서 정당성을 보장 받는다는 말인가?
재야 운동권 출신의 대통령이니 여타 정치인에 비해 '정의'와 '진실'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는 점은 백분 이해한다. 그리고 오랜 독재권력의 시대에 관행으로 굳어진 '박정희 패러다임'보다 노 대통령의 정치관이 도덕적으로 훨씬 우월하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노 대통령도 틀릴 수 있다. 그랬을 때는 지체 없이 이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몇 년 뒤 '참여독재'라는 말을 듣지 않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신 재 민 정치부장jmnew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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