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일본 도쿄. 세계 최고의 물가로 악명 높은 이 도시 상가 곳곳에 할인 광고가 나붙었다. 하지만 소비는 갈수록 움츠려 들었고, 얼마 후 '90% 할인' 바겐세일이 시작됐다. 일본 경제가 10년이 넘는 장기불황에 빠져드는 순간이다.2003년 4월 한국 서울. 시청에서 을지로로 이어지는 지하상가에는 일제히 바겐세일 전단이 붙어있다. 또 가전업계가 앞 다퉈 세일에 들어간 것은 물론, 물건값을 깎아주는 대형 할인점도 대규모 할인 경쟁을 벌이고 있다.
경제계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디플레이션 경고음이 나오고 있다. 국민은행 연구소는 7일 '주택시장 위험요인 진단' 보고서를 통해 "급등세를 타던 국내 주택가격이 일부 하락세를 보이면서 주택가격 폭락과 이에 따른 경기침체 가능성이 우려된다"고 경고했다. 이 보고서는 국내 주택시장과 일본 부동산 버블붕괴 당시와 비교할 때 저금리 기조와 시중의 풍부한 유동성 부동산 가계대출 급증 내수의존적인 성장전략 물가안정 측면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를 넘어선 할인경쟁
할인점 홈플러스는 최근 1,000개 품목의 가격을 10∼30%를 낮춰 할인점간 할인 경쟁의 불을 지폈다. 예를 들어 홈플러스가 2,500원대 오렌지 주스를 2,290원으로 내리자 이마트는 2,080원으로 내렸고, 홈플러스가 다시 2,080원으로 맞추자 이마트도 1,880원으로 내렸다.
가전 유통업체의 할인 경쟁도 뜨겁다. 하이마트는 최근 280만원짜리 도시바 프로젝션 TV(모델명 46VW8UK)를 80만원이나 깎아주고 있다. 테크노마트는 한술 더떠 19일 하루 동안 드럼세탁기 등 일부 품목을 절반가격으로 판매하기로 했다.
문제는 할인 경쟁에도 불구하고 판매가 늘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 전자제품 매장의 한 관계자는 "세일에 나섰지만, 매출은 제자리고 오히려 추가 세일 가능성을 묻는 사람이 많다"고 한숨을 쉬었다.
디플레이션 대비해야
디플레이션이란 과잉생산, 과잉공급으로 인해 경제 성장이 둔화되는 현상. 과잉공급에 따른 물가하락에 이어 담보가치 하락, 기업·금융기관의 도산, 소비·투자위축 등이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 저 성장 속에 경제가 활력을 잃고 만다.
대부분 경제 전문가들은 주식과 부동산 버블 붕괴에 이어 디플레이션에 들어간 일본 경제와 부동산 가격 하락폭이 작은 우리 경제의 상황이 다른 만큼 일본식 디플레 가능성은 낮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할인 경쟁에 나선 일부 업계는 벌써 디플레를 체감하고 있는 상황. 가전업계 관계자도 "당장 살기 위해서 할인하는 상황이 지속될 경우 결국 공멸을 초래할 것"이라며 "디플레이션을 염두에 두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 전무는 "수요는 줄고, 재고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 우리 경제는 불황의 초입 단계"라며 "디플레이션에 들어갈 가능성도 있는 만큼 정책적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천호기자 tot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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