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쌓인 컨테이너 불황의 물증3일 낮 부산 동구 초량동 부산항 제4부두. 부두 앞 8차선 도로로 짠 내가 밀려든다. 그 냄새를 이 곳 부두 사람들은 '불황 냄새'라고 했다. 부산 경제의 30%를 차지한다는 항만 물류 산업의 불황은 전국적인 경기 침체의 시원(始原)이라고도 했다.
4부두 건너편 부산진역 야적장은 컨테이너들로 빈 자리를 찾기 힘들다. 배에 실리거나 수입된 뒤 화주가 찾아가기 전에 보관된 화물들. 야적장의 한 직원은 이를 불황의 '물증'이라고 했다. "수출이 안되니 쌓아놓는 수밖에, 그러니 수입도 안되고…." 특히 이라크전 때문에 중동쪽 배가 안 들어오면서 사정이 더욱 나빠졌다고 했다.
점심 시간. 부두 노무자 김태식(51)씨는 "작년 이맘때보다 한 달에 가져가는 돈이 50만원은 줄었다"고 했다. 그는 "바쁠 때는 밥도 교대로 묵음서 일했는데 요새는 이래 여유 있으니 어디 묵고 살겄나. IMF때도 꼭 이랬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노무자가 "IMF때보다 더 해. 그나마 있는 화물도 중국 환적(換積) 화물 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 수출입 화물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막 부두에 컨테이너를 내려놓기 위해 들어온 트레일러 기사는 "기름값은 오르는데 일은 없지, 일 받으려고 기사들끼리 싸움도 벌어진다"고 했다.
한 때 부산을 대표하던 신발 산업은 중국으로 동남아로 싼 노동력을 찾아 떠나고 지금은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강서구 송정동 녹산산업단지 한 신발 업체를 찾았다. 2000년 4개 라인으로 문을 열었다는 이 공장이 현재 가동중인 라인은 겨우 1개. 사장 김모씨는 "작년 11월부터 내수쪽은 아예 생산을 중단했고 수출쪽만 보고 있다"고 했다. 궁여지책으로 올들어 관리비도 20% 줄였단다. 그 만큼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다는 얘기다. 이 회사의 한 직원은 "중소기업서 20∼30년 일한 사람들이 택시기사로 전업한다고 난리도 아니에요"라고 했다.
광주-고사직전 재래시장 설상가상
4일 광주 서구 양동시장. 그렇지 않아도 백화점과 마트 등에 손님을 빼앗겨 고사직전의 재래시장에 최근의 불황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시장 초입 한복가게 여주인 한모(45)씨는 "요즘은 결혼할 때도 한복을 빌려 입고 만다고 하대요"라고 했다. "한창때는 가게 앞에 물건을 못 내놓을 정도였는데 요즘은 상인들끼리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 가는 경우도 허다하다"고도 했다. 그래도 '장사꾼 엄살'이라 싶었는데 몇 시간 머물러 본 시장 안은 정말 그랬다. "애기들 대학가고 고3이라 한창 돈 들어가는 땐디…." 한복 파는 주인의 이마에 주름살이 그려진다.
시장 상인들의 3분의2는 세입자다. "위치 따라 한 달에 70만∼100만원씩 내는 세와 관리비를 연체하는 가게도 수두룩하다"고 했다. 야채가게를 운영하는 한 60대 노파는 손에 꼽힐 듯 오가는 사람들을 내다보다 "사람들이 다들 어디로 가부렀는가, 안 묵고 사는가"라며 한숨 섞어 말한다. 그릇 가게를 운영하는 강모(43)씨는 "문닫고 싶어도 할게 없어서 그냥 붙잡고 있는 사람이 많당게요"라고 했다. 재래시장은 5∼10월이 비수기이고 11∼4월이 성수기란다. "성수기에 불황 타버리고 이제 곧 비수긴디 죽으라 죽으라 하는 것이제. 문제는 전쟁 끝나도 별로 나아질 것 같잖아서 걱정이요." 홍어를 다듬던 한 50대는 풀 죽어 말했다. 식당들도 앓는 소리를 해대기는 마찬가지. "가게 사람들이 장사가 안되니 요즘에는 전부 도시락을 싸와 부려요"라고 했다.
소비도시 광주의 백화점은 서울에서 발령 받아 왔다가 진급해서 올라가는 곳이라고 한다. 그만큼 영업실적이 좋다는 얘기다. 하지만 거기 사정도 나아보이지 않았다. '세일'에 '경품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입구와 매장 곳곳에 나붙었지만 연휴를 앞두고도 매장 안은 한산했다. 이 백화점 홍보실 관계자는 "세일에다 사은행사까지 하는 경우는 없었다. 아직 집계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매출 하락이 예상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대전-캠퍼스엔 잔인한 취업난
충남대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양 편에 달고 자리잡은 대전 유성구 궁동의 정오. 외식 나온 학생들로 북적였을 거리는 민망할 정도로 한산했다. '자장면가격 동결'의 보답으로 충대 학생회가 모범업소 패를 부여했다는 청룡각 이정시(여) 사장은 '매상 30%감소'의 정황을 1,000원권 지폐 유통량의 함의로 풀었다. "좋을 때는 1만원짜리 내고 거슬러 가지만 요즘은 1,000원짜리 내는 학생들이 많아요." 그래서 너덧 달 전만 해도 늘 부족했던 잔돈(1,000원권)이 요즘은 장사 끝내고 나면 2배로 는다고 했다. "평상시 5만원대 안경이 주류지만 지금은 2만5,000원대 최저가 제품 매출이 전체의 절반입니다."(좋은안경점 최 사장) "행정수돈가 뭔가 때문에 여기랑 서구가 묶인 뒤로는 앉아서 밥 팔아 죽쒀먹고 있소."(현대부동산 윤 대표)
캠퍼스의 '잔인한 4월'은 취업 재수생(2월 졸업생)을 보면 쉽게 수긍이 간다. 지난 시즌 고배를 마신 졸업생 정모(26)씨는 "그렇게 (원서를)뿌렸는데 되는 건 로또만큼 어렵더라"고 했다. "이젠 현역(8월 졸업예정자)들과 맞붙는데 그나마 상반기에는 기대도 하지 말라니 막막합니다." 충남대 관계자도 "추천서(원서)도 양·질적으로 지난해 이맘 때의 70% 수준"이라고 했다. 증권사를 노려 지난 학기를 쉬고 금융자산관리사와 투자상담사 자격증을 따 뒀다는 현역 김달겸(경제96)씨도 연신 한숨이다. "상반기에는 신입사원 뽑는 증권사가 하나도 없는데 전쟁 끝나면 또 '북핵'이라니…." 그나마도 사립대는 더 열악하다. 한 사립대 남학생은 "우리야 눈을 낮추면 어디 영업직이라도 되지만 여학우들이 더 큰일"이라고 했다. 그는 "과 수석도 전공 못 살리고 학습지 교사자리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열에 일고여덟은 물으나 마나 경기 안타는 공무원시험 공부였고, 간호학과 등으로 학사편입을 준비하는 이는 집에 여유가 있는 축이라고 했다.
경기-인력시장선 일당 덤핑까지
3일 오전 8시 경기 성남시 복정4거리 인력시장. 해가 떴으니 이날 '거래'는 사실상 끝난 셈. 하지만 미련을 두고 남은 이도 적지 않다. "오늘? 300명 잡고, 일 따라 간 눔이 60∼70명이나 될라나…." 김모(53)씨는 "일주일에 한 번(일당 7만원) 일 잡는 꼴이니 밥 값도 안된다"고 했다. 이들은 인력회사를 탓했다. "없는 일거리를 그눔들이 다 빨아묵으니 복정동 경기가 이 모냥"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력회사 사정도 거기서 거기였다. 인근 동광인력 최대원(44) 사장은 "날 풀렸으니 한창 바쁠 땐데 일거리가 지난해 60%도 안된다"고 했다. 잡역부 일당도 지난 해 7만원에서 6만원으로 내렸고, 5만5,000원에 덤핑치는 회사도 적지않다는 귀띔. 새벽 인력시장 상대 장사로 청춘을 보냈다는, 1평짜리 성남슈퍼 주인 박모(60)씨는 "새벽4시부터 지금까지 3만원 장사도 못했다"고 했다. "소주5병, 맥주3병…." 장부도 없이 이날 매상을 꿰던 그는 "소주도 돈이 있어야 마시지, IMF때도 지금보단 나았다"고 했다.
삼성단지 배후 주상지구로, 주민 둘에 하나는 삼성 볕을 쬔다는 수원 팔달구 영통지구. 길가에 택시들이 줄줄이 섰다. '가스값이라도 아끼기 위해서'라고 했다. 택시기사 한순창(46) 씨는 "지난 해만 해도 시간당 1만원 벌이는 했는데 요즘은 13∼14시간은 해야 10만원 만든다"고 했다. "밤에도 장거리는 없고 기본요금 손님 뿐"이라고도 했다. 술집도 안 된다는 반증. 영통 중앙로에서 만난 야채 도매행상 이모(47)씨는 "소양댐이 터져도 물 드는 건 3,4시간 뒤"라며 '지금이 IMF'라고 말했다. "작년에는 가락시장서 물건 떼다 분당 수지만 돌고 오후 3,4시면 일이 끝났는데 지난 해 말부터 신갈 지나 영통까지 들어와야 합니다." 1톤 포터 한 차 다 털면 오후 9∼10시. "일주일에 서너 번씩 물건 받던 식당들이 한 두 번으로 줄고, 외상도 늘었어요." 일주일에 한 두 번 재료 받는 식당은 하루라도 일찍 때려치우는 게 남는 장사라는 게, 별로 어긋나지 않았던, 그의 10년 행상 경험칙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이동훈기자 dh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