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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 / "여보, 이젠 내가 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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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 / "여보, 이젠 내가 안을게"

입력
2003.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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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바로 옆 자리의 남편을 애써 피했다. 그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서로가 말을 아꼈다. 그러다 보니 여행 내내 서로 말없이 걸음을 재촉하기만 하였다.남편은 얼마 전 25년간 다니던 직장을 정년퇴직했다. 그이는 "이제 쉬고 싶다"고 말했다. 예고된 퇴직이었지만 나는 마음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말로는 "잘했어요. 이제 푹 쉬고 여행도 하세요"라고 했지만 갑자기 현실과 생활에 대한 불안이 엄습했다. 그리고 끝 모를 상실감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비록 아이들 교육은 마쳤지만 그것으로 모든 걸 마무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허무하고 허탈한 기분이야 그이가 더 하리란 생각을 못한 건 아니었다. 그이를 위하여 무엇이든 밝게 해야 한다는 것 역시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은 걸 어찌하랴. 연극하는 것처럼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난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황혼의 준비는 마음뿐 실제로는 아무 것도 준비된 게 없었다. 아니 여유마저 없었다. 나 역시 최근 난소와 자궁에 물혹이 발견돼 힘든 시기를 넘겼던 터였다.

얼마 전 고향의 친척이 쌀을 보내 왔다. 이미 가을에 한 차례 보내왔건만 그이의 퇴직 소식을 듣고 또 보내는 것이리라. 묵직한 쌀을 집안으로 들여놓으며 나도 모르게 "당분간 쌀값은 안 들겠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한 말에 나 자신이 화들짝 놀랐다. 예전에는 쌀을 받으면 이웃이나 친척에게 나눠 줄 생각부터 먼저 하던 나였는데…. 이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남편은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이의 처진 어깨를 보며 안쓰럽긴 했지만 이번에도 나는 아무런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미안했다.

봄이다. 봄단장 하는 모든 것처럼 나도 좀 달라져야겠다. 가족의 허전한 공간을 채워주고 감싸주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첫 단추임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아무 때나 찾아가도 넉넉한 품으로 우리를 안아주는 자연처럼. 황혼를 맞은 그이에게 '넓은 품'이 되야지. 매서운 겨울 바람을 막아주던 어린 시절의 벙어리 장갑처럼 마음 훈훈하고 정감어린 아내가 되리라고 뒤늦게 다짐해본다. 서재의 남편에게 따스한 커피 한잔을 타줄까 보다.

/손진숙·서울 동대문구 이문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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