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 서른 살이 된다구. 그거 알아? 서른이 넘은 여자가 남자를 찾는 건 폭탄에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거 말이야."2003년 서울의 봄을 살아가는 당당한 서른살 여성이라면 영화 '파니핑크'의 여주인공이 절박하게 외친 이 대사를 통쾌하게 비웃어 넘길 것이다. 여자 나이 서른은 그 무엇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젊음의 화려한 '피날레'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곳에 다다르기 한 발자국 전, 29세 여성에게 30이라는 숫자가 주는 공포는 가히 압도적이다.
'29, 애인 말고도 갖고 싶은 건 많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연극 '여우들의 파티'에 출연한 은수(29) 리나(28) 주은(29) 선미(29) 유리(33)(모두 닉네임)가 29세 여성들의 관심사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30, 건너뛸 수만 있다면…
선미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딱 하나야.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것. 내가 스물 아홉이라니…. 믿어지지 않아.
은수 스물 아홉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나이라고 하더라. 결정적으로 20대는 너무 구질구질하지 않니? 돈도 없고 이룬 것도 없고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여러모로 29는 기분 나쁜 숫자야.
리나 이 나이 되도록 이룬 것이 없다는 게 너무 싫어. 내가 아는 한 친구는 2년 동안 적금을 부어서 벌써 3,000만원 넘는 돈을 가지고 있어. 그런 통장이라도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할 것 같아.
주은 스물 다섯이 넘으면 갑자기 시간이 빨라져. 아무리 시시한 계획이라도 실현시킬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단 말이야.
리나 그래. 그냥 이십대는 이렇게 확 접어버리고 서른에 다시 시작하고 싶어. 새로운 10년의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 삼십대가 싫은 게 아니고 서른 살이 싫은 거야.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 20대의 마침표 같아서 서글퍼. 그냥 건너 뛰었으면 딱 좋겠어.
결혼이 아니라 결혼식이 하고 싶어
수희 이십대 후반은 결혼하기도 참 애매한 나이인 것 같아. 아예 일찍 하거나 늦게 하면 모를까 이렇게 어정쩡한 나이에 결혼하는 건 정말이지 '후졌어'.
유리 일찍 한 친구들을 보면 부럽긴 해. 어렸을 때는 빨리 결혼하고 싶었어. 그럴 때 결혼을 했어야 했는데 이젠 너무 머리 속이 복잡해.
선미 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얼마 전 문득 결혼보다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걸 깨달았어. 결혼 생활을 생각하면 무덤덤하고 심지어 끔찍한데, 웨딩드레스나 화려한 결혼식장은 진심으로 동경해. 멋지잖아!
수희 그런데 결혼식 당일은 지독한 스트레스로 두통이 온다는 거 아니냐. 결국 결혼은 별로라는 게 결론인가?
리나 할 수만 있다면 동거를 해보고 싶어. 잡지에서 봤는데 영국에 20년 동안 결혼 안하고 애도 없이 동거만 하는 커플이 있대. 왜 결혼 안 하냐고 하니깐 다른 사람한테 소개하면서 '내 여자친구야'라고 하는 게 '내 와이프야'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섹시하게 느껴진다는 거야. 너무 멋질 것 같아.
리나 혼전 순결에 관한 인식도 많이 바뀌었어. 어디서 보니깐 여자친구의 순결을 기대하는 남자는 이제 20% 밖에 안되더라고. 우리 아이들이 클 때쯤이면 혼전순결이라는 말이 우스워질거야. 그리고 섹스를 한다고 순결하지 않은 거야? '순결'이라는 단어 자체가 웃긴 거라고.
수희 아이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난 결혼은 싫지만 아이는 가지고 싶어. 나의 분신을 하나 가지면 든든할 것 같아.
은수 난 고등학교 때부터 아기를 가지고 싶었어. 섹스를 하고 싶었다는 게 아니라 아기가 뱃속에 있다는 느낌을 갖고 싶었어.
유리 요즘은 늦게 결혼하는 게 너무 일반화해 아이도 늦게 낳거나 아예 낳지 않는 것 같아. '애가 대학 갔더니 환갑이더라' 이 정도는 양호한 거야. '애를 낳았더니 환갑이더라' 이렇게 될 수도 있어.
사랑 때문에 일을 버려? 말도 안돼!
수희 이 연극 보면 친구들끼리 섹스 얘기 많이 하잖아. 그런데 정말 이렇게 적나라한 대화를 해? 친구들이랑? 난 해본 적 없어, 솔직히.
유리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나는 많이 해. 재미 있잖아. 이십대 후반이면 섹스 얘기는 충분히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이십대 초반에는 수줍어서 못하지만.
은수 뭐가 수줍어? 요즘 애들은 중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섹스에 관해 상의한다잖아.
리나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성 얘기 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너무 모순되지 않아? 남자들은 고등학교 졸업하면 6만원 들고 '나쁜 곳', 아니지 자기네들 표현대로라면 '좋은 곳'에 가면서 여자들은 입 닥치고 있으라는 거야? 여자들이 성에 대해 무의식 중에 죄의식을 가지는 건 털어 놓고 얘기할 데가 없기 때문이라고.
유리 그렇지만 우리 나이엔 섹스 말고도 고민거리가 너무 많아. 가장 대표적인 고민이 일과 사랑 사이의 갈등인데 요즘 일 포기하고 사랑 찾아 갈 여자가 있을까?
은수 이제 여자들도 약아져야 해. 남자가 이성으로 다가올 때 애인으로는 싫지만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아군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나도 날 좋아하는 오빠가 한 명 있었는데 남자로서는 싫지만 내가 추진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 같더라고. 그래서 단칼에 끊어버리지 않고 잘 주물러서 요즘은 긴요하게 써먹고 있어. 남자들 봐. 여자 상사에게 얼마나 잘하는데.
리나 아니, 그런데 결국 남자 얘기란 말야? '29, 애인 말고도 갖고 싶은 건 많다'가 우리 표어 아니었어?
수희 일을 위해 사랑을 멋지게 포기할 수 있으려면 능력 있는 멋진 여성이 돼야 해. 그리고 스물 아홉이면 아직 늦지 않았어. '서른 우울증'은 빨리 버리자. 잊지마! 우리의 목표는 '멋진 마흔'이라구.
● "여우들의 파티" 는
퓰리쳐상 수상 작가인 웬디 와서스타인 원작의 '여우들의 파티'는 이십대 후반 여성들의 고민을 시원하게 풀어낸 세미뮤지컬.
최고의 여대를 졸업했다고 자부하는 다섯 명의 동창생들이 졸업 후 6년이 지나 스물 아홉이 돼 다시 만난다.
나이 서른이 되면 모두 대단하게 돼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변호사가 된 수희를 제외하곤 모두 별 볼일 없는 처지. 수희 역시 번번히 실패하는 사랑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다.
이들은 모여 대학 때를 회상하며 사랑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은 후 '마흔살이 되면 우린 정말이지 굉장해질 거야'라며 헤어진다.
극단 비파와 사조의 합동공연으로 4월 8일부터 한 달간 대학로 리듬공간 소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문의 02)766―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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