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시절. 김병준(金秉準·49)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낙선한 노무현 전 의원이 운영하는 지방자치실무연구소로부터 강연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정치인이 간판만 내세운, 그저 그런 연구소려니' 하고 거절하려다 전직 국회의원의 체면을 봐서 강연에 응했다. 노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자 오랜 인연의 시작이었다.김 위원장은 이듬해 이 연구소의 소장이 됐다. 어느 민간연구소보다 활발한 연구분위기에다 지방자치에 대한 노 대통령의 열정에 감복한 터였다. 97년 이후 자금난으로 해체 위기를 맞았지만 십시일반 회비로 근근이 버텼다. 99년엔 이사장으로 승진했다. 일본 게이오대 교환교수로 가게 돼 소장직을 사임했더니 노 대통령은 대수롭지 않은 듯 "그럼 김 교수가 이사장을 하세요. 내가 소장을 하지요"라고 말하더란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었다. 한때 회원이 400명에 달하면서 원혜영 부천시장 등 인재도 여럿 모였다.
팔자에 없는 이사장이 된 그는 2001년 대통령 경선 캠프도 떠맡았다. 별도로 선거사무실을 꾸릴 형편이 안돼 연구소가 그대로 캠프로 바뀌었기 때문. 대선에서는 정책자문단장으로 변신했다. 그의 말대로 "노에게 완전히 엮인 것"이다.
노 대통령의 핵심 브레인이지만 그는 몸을 낮추려고만 한다. 정책자문단장이나 인수위 정무분과 간사도 "나는 적임자가 아니다"며 다른 학자를 수 차례 추천했다. 행정수도 이전 등 지방·행정 공약의 상당수는 그의 작품이지만 타인에게 공을 돌렸다. 그는 "대선 직후 열흘간 휴대폰도 끄고 잠적했는데 인수위 간사로 내정됐다는 기사나 나더라"며 어이없어 했다.
정치학회 부회장을 지낸 그는 정치학계의 마당발이다. 아내가 "당신, 정치할 거냐"고 놀릴 정도다. 그러나 본인은 체력, 기질, 돈이란 기본조건에 권력의 유혹을 떨칠 신념, 그리고 용기 등 '정치인의 3대 자질론'을 내세우며 "나는 당최 글렀다"고 고개를 저었다. "주변 정치인이 모두 노 대통령의 개혁노선을 따라온 걸 보면 나도 제대로 살았지?"라고 반문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골수 '노무현맨'이다.
김 위원장은 스스로를 '집돌이'라고 부른다. 집에 틀어박혀 비디오 보고 집안 꾸미고 가족과 대화하길 좋아해서 아내가 붙여준 별명이다.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수집한 작품도 수십 점에 달한다. 그러나 그에겐 정치나 입각 이상의 욕심이 있다. "이미 학문으로 정상이 보이는 데 뒤늦게 무슨 정치냐? 다만 모순된 정치·사회 구조와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고 싶은 것이지." "정부혁신위원장도 이 때문에 맡은 것"이라며 헛헛 웃는 얼굴에는 한 시대를 통째로 훔치려는 대도(大盜)의 포부가 엿보인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