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문 지음 민음사 발행·8,000원이제 정영문(38)씨의 소설은 읽기 편해졌다. 중·단편 7편을 묶은 네번째 소설집 '꿈'은 여전히 난해하긴 하지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를 갖춰놓았다. 혹은 독자들이 이제는 정씨의 소설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정영문씨는 한국 문학에서는 낯선, 환상과 관념으로 짜여진 소설을 선보인 작가다. 그는 권태와 공허, 존재의 불안, 죽음을 향한 과격한 유혹 등을 작품의 주제로 삼으면서 의식 너머의 지극히 몽환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이런 그의 작품을 두고 평론가 이남호씨는 "어떤 것들은 서사가 전혀 없이 짧은 생각만으로 되어 있어, 소설도 이야기도 아닌 듯이 보이지만, 소설이건 아니건 상관없다"고 평했다.
이번 소설집은 그러나 표면적으로나마 이야기의 얼개를 띠었다. 단편 '죽은 사람의 의복'에서 남자는 비 오는 어느날 이사 갈 집으로 찾아가 주인 여자를 만난다. 저녁 식사를 약속한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서 여자는 남자에게 저녁을 먹고 갈 것을 청한다. 식사를 마친 뒤 여자는 "사실은 누구도 오기로 하지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여자는 사귀던 남자가 자살을 했다면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자의 죽음을 계기로, 모든 일상이 마비돼 버렸다고 말한다. 죽음은 정영문씨의 소설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주제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거예요"라는 여자의 말은 그만큼 죽음을 가까이서 의식하는 작가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단편 '파괴적인 충동'에서 죽음에의 현혹은 좀 더 난폭하게 드러난다. 뇌사 상태에 빠진 아버지를 안락사시켜야 하는지 고민하는 화자는 테니스를 치다가 죽어가는 쥐를 발견한다. 그는 몸을 뒤집은 채 경련하는 쥐를 라켓으로 힘있게 내리친다. 그는 이 파괴적인 행위를 지극히 태연하게 행한다. "사실 나는 아무런 느낌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쥐를 내리치는 일을 태연하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기보다는 수행하듯 했고, 그래서 그 태연함이 다소 지나치다고 생각될 뿐이다." 이어 전날 자신을 칼로 위협하면서 돈을 빼앗은 아이를 산 속에서 발견한 남자는, 아이에게 다가가 양말로 싼 돌멩이로 머리를 내리친다. 실신한 아이를 향한 남자의 섬뜩한 태도는 쥐를 죽였을 때의 태연함을 넘어선다. "나는 잠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했고, 그가 추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외투를 벗어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자 내가 추웠고, 그래서 나는 그 외투를 벗겨 다시 껴입었다."
정씨가 보여주는 죽음을 향한 파괴적인 충동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위험하게 줄타기한다. 표제작 '꿈'에서 실종자를 찾아 어느 섬에 들어간 화자는 돼지가 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는 꿈을 꾼다. 이 꿈은 그러나 섬으로 들어가는 배에서 꾼 꿈이고 화자는 아직 섬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꿈과 현실이 뒤섞여 있듯 죽음은 삶과 뒤섞여 있다. 그렇게 삶 속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늘을 보여주는 것이 정씨의 소설이다. 그는 그것을 친숙하고 안락하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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