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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띄우는 편지

입력
2003.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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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맨홀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떨어지면서 발목과 어깨를 심하게 다쳤지만 정작 고통스러운 것은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두움, 그리고 어딘가에 갇혀있다는 끝 모를 공포였습니다. 밤새 울다가 마을 어른의 도움으로 탈출한 것은 아침 무렵입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악몽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동굴로의 여행을 권하면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맨홀 속에 빠진 기분일 것이란 생각 때문입니다. 용기를 내게 한 것은 순전히 직업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굴 속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웬만한 동굴은 모두 기억 속에 있습니다.처음에 들어간 굴은 단양의 고수동굴입니다. 한여름이었습니다. 굴에 들어가자 온도가 뚝 떨어졌습니다. 반팔에 반바지 차림의 서투른 여행객은 폐쇄된 공간이 주는 공포에 덜덜 떨면서 굴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눈 앞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고수동굴은 아름답기로 소문난 굴입니다.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동굴의 출구를 나올 때에는 다시 들어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후 몇 달간은 마치 박쥐처럼 전국의 동굴을 찾아 다녔습니다. 맨홀이 남겨준 공포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혼자만의 동굴 여행법이 몇 가지 생겼습니다. 한 가지만 소개할까요.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모든 동굴은 어둡지 않습니다. 모두 불을 밝혀 놓았고, 쇠나 나무로 계단과 복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원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원래 모습을 감상하는 방법은 없을까. 간단합니다. 눈을 감으면 됩니다. 눈꺼풀을 뚫고 불빛이 들어오면 손으로 눈을 덮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그게 동굴의 본래 모습입니다. 귀를 기울입니다. '똑똑….'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낙수소리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수억년간 이 동굴은 이 모습과 이 소리 뿐이었다.' 세월의 무게가 가슴에 잡힙니다.

높은 산에 올라 사람이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세상을 내려다보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인간 세상은 얼마나 하찮은가.' 깊은 동굴 속에서 눈을 감고 낙수 소리를 들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차지하고있는 시간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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