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행정부에서 서열파괴의 바람이 불고 있다. 새 법무부 장관을 임명하면서 일어난 검찰에서의 서열파괴에 이어 각 부처에서 고위 공직자의 고시 기수 파괴가 나타났고, 1급 이상 공무원의 대부분은 스스로 알아서 물러나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서열파괴란 근무연수에 따라 월급이 올라가고 일정한 근무연수를 채운 사람 중에서 승진 대상자를 찾는 연공서열제 인사관리 방식을 없애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사실 민간기업에서 먼저 시도되었다. 민간기업에서 연공서열제를 파괴한 이유는 그런 인사관리 방식으로는 변화하는 경영환경에 대처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과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서 변화에 민감한 젊은 층 중에 새로운 아이디어와 힘찬 추진력을 가진 인재를 발굴하여 일의 책임을 맡김으로써 활력을 찾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우리 기업의 경우 외환 위기를 전후하여 팀제를 도입하면서 팀의 성격에 맞추어 젊은 인재를 팀장으로 쓰는 사례가 늘었다. 이러한 변화는 대부분의 경우, 수익성을 중시하는 기업으로서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가령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업종에서는 젊은 사람이 팀장을 맡아 소비자와 비슷한 감각을 가지는 것이 유리하기 마련이다. 정보기술산업의 경우에도 새로운 기술에 익숙한 사람에게 팀장을 맡겨 정보화를 추진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 때문에 민간 기업에서 40대 임원이나 30대 팀장을 발견하는 것이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젊은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는 현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이다. 만약 어떤 조직이 오랜 경험을 가진 인재가 많아야 성공할 수 있다면 연공서열제가 적절한 인사관리 방식이 될 수 있다. 기억하다시피 1980년대에는 일본 경제가 부각되면서, 미국 기업들이 근로자에게 안정적 일자리를 제공하는 대신 충성을 요구하는 일본식 연공서열제 방식을 도입했다. 현장 경험 축적과 공정의 점진적 개선이 필요한 전통 제조업의 경우 이러한 인사제도가 과히 나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공서열제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가 정체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한다면, 어떤 조직에서 서열을 중시해야 하는지, 아닌지 여부는 '그 조직의 기능이 무엇인가'하는 과업 중심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지 사람 중심으로 판단해야 하는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행정부도 급격한 서열파괴를 해야 할 만큼 역할이 크게 바뀌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지, 인사대상자의 사고방식이 인사권자의 그것과 얼마나 비슷한가를 우선적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 복지 부문, 과학기술 부문에서는 기능의 변화가 크겠지만, 일반 행정 부문, 법률집행 부문 등은 사회 유지라는 전통적 정부 기능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서열파괴를 통해 무조건적으로 일정 경력 이상의 사람을 내쫓는 방식은 곤란하다. 경력이 적은 사람을 승진시키는 것은 결과적으로 서열화를 강하게 할뿐이다. 만약 조직활성화를 위해서라면 조직 구조를 바꾸어야지 인재를 쫓아내는 방식은 안 된다. 조직 개편의 타당한 방향은, 무차별적인 서열파괴식이 아니라 그 조직을 좀 더 수평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중요 보직을 순환제로 바꾸고 보직자가 정보전달자의 역할을 하게 하면 된다.
그런 점에서 어떤 인사 담당자가 공무원을 오래 했으면 이제 집에서 놀 때도 되었다고 말한 것은 표현의 솔직함에도 불구하고 해당 공무원 뿐 만 아니라 조직 전체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원숙한 공무원, 검사, 판사들이 백발을 날리면서 책임자로서의 보직을 끝내고 일선 현장에서 또는 자신의 고향에서 사심 없이 공정한 업무를 집행하는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을 것인가?
홍 기 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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