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4월1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유림이 서울 제기동 자택에서 작고했다. 향년 67세.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그가 일찍이 부자의 연을 끊어버린 외아들 원식(原植)을 포함해 유림을 임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유해는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사회장을 거친 뒤 수유리에 묻혔다.유림의 본명은 화영(華永)이고 호는 단주(旦洲)다. 경북 안동 출신.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자 유림은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는 혈서를 쓰고 항일 독립운동에 몸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는 그 맹세를 지켰다. 유림은 일제 시대 대부분의 세월을 조선 땅에서는 옥살이를 하며, 감옥을 나오면 중국으로 가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하며 보냈다. 그러나 그가 '충군애국'을 맹세했을 때 그 충성의 대상이 좁은 뜻의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면, 그는 그 맹세에 충실하지 못했다. 그는 왕정을 거부하는 공화주의자 가운데서도 한 극단에 있다 할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이다.
1922년 대만의 청두대학(成都大學)에 입학하면서 아나키스트가 된 유림은 1929년 평양에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해 활동했고, 이와 관련해 징역살이를 한 뒤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을 때도 아나키즘의 깃발을 내리지 않았다. 사실 김구의 한국독립당 일색이었던 임정은 무정부주의자연맹의 유림을 비롯해 좌파 인사들을 국무위원으로 맞아들인 1944년에야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을 꾸릴 수 있었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유림은 독립노동당을 창당해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분단 이후 우익으로 단색화한 남한 정치권에서 그의 혁신 노선은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혁신동지총연맹 후보로 나선 1960년 7·29선거를 포함해 그는 한 차례의 선거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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