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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숲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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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숲의 질서

입력
2003.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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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라지만 깊은 산속에는 아직 봄이 보이지 않는다. 북쪽 응달엔 여태 잔설이 깊고, 눈 녹은 양지도 새 생명이 싹트기엔 아직 바람이 차다. 그러나 마을 가까운 산자락에는 봄을 알리는 숲의 질서가 작동되었다. 아카시나무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같은 키 큰 활엽수들은 겨울 모습 그대로지만, 그 숲에 사는 작은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잎눈을 키우고 있다. 큰 나무들은 찔레나무 명자나무 같은 하층식생이 먼저 생명활동을 할 수 있도록 느긋이 기다려 주는 것 같다.■ 진달래 개나리 산수유 같은 것들이 잎도 나기 전에 꽃부터 피우는 것도 숲의 질서가 아닐까. 키 큰 나무 잎들이 자라 햇빛을 가리면 꽃을 피울 수 없는 운명이기에 먼저 서두르는 것이리라. 나무보다 키가 작은 풀들은 더 부지런하다. 낙엽이 쌓이고 썩고 또 쌓인 두터운 부엽토 층을 뚫고 나온 풀들은 벌써 보리만큼 자랐다. 풀들의 세계에서도 작은 것들이 부지런한 것은 자연의 섭리다. 이름 모를 꼬마 풀들은 벌써 꽃을 피운 것이 많다. 보아주는 이 없이 보잘것 없는 꽃이 지는 것도 있다.

■ 봄 꽃은 생명활동의 상징이다. 열매를 맺기 위한 몸부림의 결정체가 꽃이라면, 그 향기와 자태로 벌 나비를 유혹하기 위한 수단이 꽃이라면, 잎이 나기 전에 터지는 봄 꽃은 종의 번식을 위해 존재하는 뭇 생명체의 모범이다. 날개 없이 날고 다리 없이 걷는 이적(異蹟)과 다를 바가 무어랴. 겨우내 눈보라와 찬 바람을 이기며, 조금씩 물을 빨아 올리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남 먼저 꽃을 피우는 것이리라. 벌 나비에 수분(受粉)을 의존하지 않는 번식법도 숲의 질서가 만든 생리인가.

■ 인간의 세계도 같은 질서로 움직여 왔다. 어른은 아이를, 젊은이는 늙은이를, 남자는 여자를, 정상인은 장애인을 보살피고 양보하는 것이 전통사회의 규범이었다. 강자와 약자,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큰 나라는 작고 약한 나라들을 보살피고 이끌어갈 의무가 있다. 그런데 요즘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힘이 셀수록 그것을 뽐내고, 가질수록 더 가지려는 욕심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작은 나라의 유전을 뺏으려는 전쟁에 생각이 미치면, 숲의 질서는 무색해 진다.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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