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인 가운데 미군을 가장 속속들이 접한 사람일 것이다. 지금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라크전 상황을 보니 미 8군에서 근무하던 옛 시절이 절로 생각난다. 이제부터 펼쳐질 이야기는 미 8군이라는 한국내의 별천지에 대한 일반인의 첫 기록이다. 도대체 거기는 어떤 곳이었나?내가 미 8군 무대에 섰던 것은 1965년∼68년까지다. 그 중의 1년 6개월은 에드 훠 활동 기간이었다. 그 때도 나는 공식 오디션만 보지 않았을 뿐, 미군 클럽의 야미 쇼(비공식 무대)에는 참가해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미군과의 뜻하지 않은 인연은 종로 기타 학원 강사로 나가던 당시, 기타를 배우러 온 미 8군 무대 무용수에 의해 이뤄졌다. 미 8군에 와서 일해 볼 의향이 없느냐는 말은 당시 먹고 살기가 너무 힘겨웠던 나에게 복음이었다. 나는 "빨리 가고 싶다"며 길을 재촉했다.
요즘은 미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세계적으로 팽배하지만 당시 미군이라면 민주주의의 보루였다. 한국인은 물론 미군들도 한국인을 좋아 했다. 세계 제 2차 대전의 승전국이라는 자신감과 함께 앳된 청년들이었던 미군의 순수한 모습이 식민 통치를 막 벗어난 한국인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던 것이다. 또 맥아더 장군이 보여준 민주주의와 반인종주의, 동양에 대한 이해 등도 한국인에게 큰 호감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전 당시 입증된 미국식 병법의 우수성도 한몫 했을 것이다.
내가 그곳에 있으면서 받은 가장 강렬한 인상은 미군에겐 군대도, 전쟁도 하나의 사업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군대를 철저하게 하나의 직업으로 보는 그네들의 독특한 시각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식, 오락, PX 등 군대와 관련된 모든 부수 기관들이 일반 사회와 똑같이 운영되는 것이다. 한국식 PX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전쟁이라는 사업을 하지 않으면, 자연히 엔터테인먼트가 활성화 한다. 전쟁도 그들에겐 결국 하나의 근무 형태, 즉 노동이므로 전쟁을 하면서도 쇼를 즐긴다. 우리가 보기에는 일견 모순된 양상이 버젓이 공존한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쇼란 상품이 미국인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목적으로 와 있다는 사람들이 전쟁은 않고 그냥 주둔만 해 있다는 상황은 사실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이 머무르고 있는 한국이란 데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그럼에도 엔터테인먼트는 해야 하는 곳이었다.
미군들은 쇼라면 사족을 못 썼다. 우리가 비포장 도로의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쓰고 미 8군 부대까지 가면 제일 먼저 기다리는 것은 미군들의 열렬한 환호였다. 이어 병사들이 우르르 나와 악기를 날라주고, 우리를 샤워장으로 안내했다.
나는 그것이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풍토에서 자연스레 파생한 결과라고 본다. 죽고 사는 전쟁이지만, 쉴 때는 오락을 제공 받을 권리를 갖는다는 인식이다. 모르긴 하되 이번 이라크전도 전방의 상황이 어느 정도 자리 잡으면 미군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벌여 나갈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는 쇼라는 개념 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미군 부대 안에는 세 종류의 클럽이 있었다. 장교(officer) 클럽, 하사(NCO:non-commissioned officer) 클럽, 사병(에어멘) 클럽 등이 그것이다. 동두천의 7사단, 문산의 2사단, 최대 규모의 용산의 8군 등 한국에 배치된 미군들에겐 쇼가 꼭 필요했다. 당시 미군 무대에 선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딴 것이나 다름 없었다.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수당도 제공되니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 오는 셈이었다.
저 '별천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전, 아라크 전황을 전해 듣는 심정에 대해 한 번 밝혀둔다. 내 경험상 가장 확실한 것은 미국인들이란 전쟁을 '직업적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국내외 반전의 목소리가 드높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그런 움직임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보라. 뉴욕 등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사는 데는 반전의 물결이 높지만, 중소 도시에서도 그렇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바로 미국인의 보수성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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