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도시로 들어서자 산등성이에 '도깨비' 같은 건물이 우뚝하다. 첫 인상에도 건물 생김이 기괴했는데 "정선군에 구전되는 도깨비를 컨셉으로 해 설계한 건물"이란다. 지난 27일 강원 정선군 사북읍 사북리 지장산 자락. 2년5개월 전 인근 고한읍서 개장, 숱한 화제를 뿌렸던 '스몰 카지노'에 이어 개장하는 '메인 카지노'다.3년 공사 끝에 세워올린 24층짜리 건물로 정식 명칭이 '강원랜드 호텔&카지노'다. 달밤임에도 개장을 앞두고 막바지 단장이 한창이다. 한 직원의 표현대로 "오픈 게임 끝, 본 게임 시작"이다.
3㎞ 떨어진 스몰 카지노를 찾았다. 폐장을 1시간 앞 둔 새벽3시. 팔도 번호판을 단 차량들로 주차장엔 빈 곳이 없다. 메인 카지노에 비한다면 오락실이지만 그간 '스몰'이 벌어들인 돈은 1조290억원. 불황일 수록 호황을 누리고, "영업실적이 너무 오르면 난감하다"고 회사측이 곤혹스러워 할 정도였다.
2시간 당겨진 폐장에 아쉬움이 가득 묻은 수백 개 얼굴들이 카지노장을 빠져 나왔다. 객실로 주차장으로, 그리고 폐장 시간에 맞춰 문을 여는 사우나와 식당으로…. 눈에 핏발 선 중년 여인에게 얘기를 붙여보려니 "메인 가려면 일찍 자야 된다"며 매정하게 발길을 돌린다.
메인 카지노가 개장한 28일 오전11시. 넓디넓은 카지노 로비를 한바퀴 휘휘 감아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만들어졌다. 그냥 구경 왔다는 촌로에서 한껏 멋을 부린 20대 여성, 연신 하품하는 40대, 범상찮은 스포츠머리 검은 양복들이 5,000원 입장권을 사기 위해 얌전히 줄을 섰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방송사 카메라 때문이었다. "얼굴 나오기만 해봐"라고 몇몇 고객들이 을러댔다. 개장 기념품은 옷걸이였다. "돈을 그렇게 벌면서 겨우 이거냐"는 타박이 내리 꽂힌 옷걸이 포장엔 '축 개장' 따위 문구는 없다. "카지노 표시가 있으면 버리고 가기 때문"이란다.
공항에서나 볼 수 있던 각종 검색기를 통과해 들어섰다. 대형 체육관 크기(연면적 8,269평) 실내엔 960대 슬롯머신이 만들어내는 '웅웅' 기계음부터 생경하다. '촤르르' 돈 떨어지는 효과음이 양념으로 섞인다.
스몰 카지노보다 5배 넓다지만 북적대기는 마찬가지다. 하루 평균 2,500명이 찾았다는 '스몰'보다 족히 세배는 더 찾은 듯했다. 카지노엔 시계가 없고 창문이 없다. 세상 사 돌아가는 것 잊고 게임에만 몰두하라는 카지노의 '세심한' 배려일 것이다. 배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천장엔 1,030대의 감시 카메라가 촘촘히 박혀 모든 테이블과 기계, 손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
카지노하면 떠오르는 슬롯머신은 사실 초보자용이다. 보통 한번 배팅에 1,500원씩. '삐리리' 돌아 결과가 나오는데 2초 남짓. 일일이 버튼 누르기도 귀찮아 아예 수십 만원을 채워넣고 이쑤시개를 꽂아 '자동배팅'해 놓은 '선수'도 있다. "30분이면 150만원은 들어간다"고 했다.
카지노 물을 어느 정도 먹으면 앉는다는 '바카라' 게임 테이블을 들여다봤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한참 고뇌하다 "후" 한숨과 함께 테이블 위에 느릿느릿 칩을 올리는 겉 멋 가득한 30대 남자, 누가 볼 새라 사부자기 칩을 내려놓는 40대 남자. 초보자인 듯 한 50대는 배팅 상한선을 넘는 칩을 놓았다가 딜러로부터 제지 당했다. 그러자 빨간 립스틱이 고혹적인 40대 여성이 물었던 담배를 뽑아내며 "그 참…" 한마디를 내뱉는다. 짜증난다는 얘기다.
카지노 게임의 룰은 의외로 단순하다. '짝, 홀 게임'이라고 보면 된다. 한쪽에 돈을 걸고 그 쪽이 이기면 먹고, 지면 잃는다. 돈 놓고 돈 먹기다. 바카라뿐 아니라 '다이사이'(주사위 3개를 던져 숫자를 합산, 대소(大小), 혹은 짝홀 기준에 따라 승부를 가린다)든 '룰렛'이든 카지노 게임의 밑절미는 그렇다. "룰이 (고스톱 만큼만) 어려워도 카지노 게임으로 정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 딜러가 말했다. 그런 '단순한' 게임을 하면서도 오만 가지 인상을 쓰고, 심각한 표정으로 연신 담배연기를 뿜어댄다. 그들에게 어려운 건 '룰'이 아니라 '돈'일 터.
이른바 '강원랜드 노숙자'들도 어김없이 메인 카지노로 이동해 있었다. 노숙자라고 해서 이슬 맞으며 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호텔에서 먹고 잔다. 공군 장교였다는 A(32)씨. 가정 문제 때문에 머리 식히려 지난해 3월 30만원을 들고 강원랜드를 찾았다가 "슬롯머신에서 2,000만원이 터졌다"고 했다. 그 맛을 못 잊어 카지노에 텀벙 뛰어들었고 한달 만에 딴 돈에 3,000만원을 더해 카지노에 갖다 바쳤다. 그 후 아예 이곳에 터를 잡고 책과 인터넷을 뒤적이고, 주사위를 던져보며 연구도 했단다.
"이제 다이사이만큼은 자신 있다"며 서슴없이 "직업"이라고 했다. 그럼 왜 한몫 챙겨서 떠나지 않느냐고 하자 명언을 토해냈다. "세게 먹으려는 순간 죽는다. 상근자(강원랜드 노숙자)들은 대개 5개월을 못 버티고 '올인'한다. 욕심을 못 버려 그렇다."
마침 한 중년 여성이 근처 슬롯머신에서 100배를 올렸다며 함박웃음 속 난리를 피웠다. A씨가 쓰게 웃는다. "처음 와서 돈 딴 사람들은 카지노에서 던진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하면 돼요."
이날 만난 다른 노숙자들의 입에서도 체험에서 우러난 명언들이 쏟아졌다. "카지노는 절대 이길 수는 없다." "따고 일어설 줄 알아야 진짜 갬블러다." "터져도 문제, 잃어도 문제다. 터지면 그 맛에 계속 빠져들고, 잃으면 열 받아 계속 한다."
명문대 통계학과를 나왔다는 B씨, 중소기업을 경영했다는 C씨, 공무원이었다는 D씨. "강원랜드측이 메인카지노는 가족형 종합 레저공간, 즐기는 공간으로 탈바꿈 시키겠다는데…"라고 기자가 '보도자료'를 인용하자 다들 '핏' 웃는다. 그렇게 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이도 있다. C씨는 "오늘 카지노 찾는 사람 중 상근자가 400명, 수속 밟는 이가 400명이라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들이 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비결은 카지노 회원카드다. 베팅 액수 등만 쌓으면 호텔의 거의 모든 시설이 공짜다. 노숙자들이 줄지 않는 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 노숙자는 "돈이 없어도 마일리지 늘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다"고 했다. "안되면 초보자 훈수 두고 칩을 얻거나 주워서라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했다.
가정파탄에다 자살한 사람이 부지기수 양산됐다. 부인 잡으러 왔다가 함께 카지노에 빠져든 남편이 있고, 1억원 잃은 건 명함도 못 내민다는 곳. A씨는 "카지노가 넓어진 만큼 이런 사람들은 기하급수로 늘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올 데가 못되는 곳이고 한번 발 들여놓으면 그날로 악순환입니다. 뻔히 알면서도 우리가 이러고 있잖아요. 도깨비 소굴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정선=글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사진 원유헌기자
강원랜드 메인카지노가 딛고 선 땅은 동원탄좌 광부들의 사택 자리다. 38번 국도를 타고 와 메인 카지노로 가려면 '쌍굴다리'를 지나야 한다. 쌍굴다리는 바로 1980년 4월 사북사태가 일어났던, 경찰과 광부들 사이에 대치선이 그어졌던 바로 그 곳이다. 많은 이가 다치거나 죽었고 아직 그 후유증이 남아있다. 사태의 발단은 임금 몇 푼이었다.
강원랜드는 90년대 중반 제2의 사북사태로 일컬어지던, 폐광지역 대책을 촉구하는 주민들의 투쟁 끝에 만들어진 산물이다. 딛고 선 땅만이 아니라 카지노는 '막장 인생'들의 절박함과 애환이 배어있는 셈이다. 한 주민을 만났다. 광부들은 카지노 덕을 좀 봤냐고 하자 "다 떠났는데 무슨…"이라며 말끝을 흐린다. 그리곤 "돈 번 이는 따로 있다"며 회사(동원탄좌)쪽을 가리킨다. 이 일대 부동산을 대거 소유했던 회사는 가격 상승으로 꽤 재미를 봤단다.
인근 연세병원 진폐병동엔 인공호흡기를 단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수백명의 전직 막장 인생들이 있다. 바로 그 옆에 카지노가 들어섰고 또 다시 막장을 향하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불야성 카지노는 웅웅거리며 이들을 받아들인다.
/이동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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